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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 진관사, 김치양, 천추태후에 대한 이야기, 불교설화

보위에 오른 진수스님

  제 5대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헌애 왕후와 헌정 왕후 두 자매 왕비는 꽃다운 젊은 나이에 청상이 되었다. 경종이 살아있을 때부터 언니 헌애 왕후의 지나친 질투심 때문에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던 헌정 왕후는 경종의 죽음과 함께 궁궐을 나왔다.
  그녀는 개성 성안의 10대 사찰의 하나인 왕륜사에 방하나를 얻어 거처하면서 관음기도를 봉행하였다. 그녀는 비록 과부가 되었지만 그의 젊음은 어느 누구도 뺏어가지 못했다. 언니와 함께 오빠이자 한 남자를 지아비로 삼고 있었으면서도 언니의 강한 질투심 때문에 남편 경종은 그녀의 방을 드나들지 못했었다.
  그녀는 아들 하나 낳고 싶었다. 하지만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따는 게 아니겠는가. 언니 헌애 왕후에게는 '송'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 송이 겨우 두 살 때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헌애 왕후는 아들에게 온갖 사랑을 다하고 모든 기대를 걸었다.
  하지마 헌정 왕후에게는 아들도 딸도 없었다. 그녀는 기도를 하면서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부처님 앞에 서곤했다.


  그 무렵 왕륜사 아래 안종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헌정 왕후가 혼자되어 왕륜사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가끔씩 바라보곤 했다. 그는 중얼거렸다.
  "참 아름다운 여인이야. 아마 이 성내에서는 저토록 미끈하고 잘생긴 미모의 여인은 다시 없을 것이야. 경종이 복이 없는 사람이지. 저렇게 고운 여인을 아내로 두고도 백년해로 하지 못하고 먼저 갔으니. 쯧쯧."
  중얼거리는 남자 목소리에 기도를 하던 헌정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 안종이 서 있었다. 그는 젊고 건강한 젊은이였다.

  안종은 진정 미안한 마음으로 허리를 꺽었다. 안종의 태도를 보자 오히려 미안해지는 쪽은 헌정 왕후였다.
  안종은 법당 안으로 들어섰다. 중앙에 모신 아미타부처님의 모습이 안종을 굽어보고 계셨다.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고 있던 그에게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헌정 왕후를 한 번 안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겠군. 부처님은 모든 중생의 원하는 바를 다 들어 주신다고 했으니. 그리고 내 이제껏 부인과 살면서 아직 자식 하나 없이 적적하게 살았는데 헌정 왕후의 몸을 빌어 아들 하나를 낳게 된다면 그 또한 괜찮을 터.)
  안종은 내심 그렇게 마음을 먹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는 단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이 왕륜사를 찾았다. 부처님께서 기도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하나의 핑계였고 그 속마음은 헌정 왕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헌정 왕후는 참으로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녀는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송악산에 올랐다. 울창한 숲을 헤치고 후여후여 산에 오른 그녀는 문득 오줌을 누고 싶다고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안심하고 바위 뒤에 앉아 소변을 보았다. 오줌 줄기는 세차게 뻗었고, 마침내 온 개성 성내가 오줌으로 홍수를 이루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일어서며 옷을 끌어 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눈 오줌이 개성 성내를 두루 잠기게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멍청하게 성내를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헛기침 소리와 함께 부스럭대며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웬 노승이 우뚝 서 있었다.
  머리는 삭발을 했지만 가슴까지 내려온 허연 수염이 언뜻 보기에도 평범한 스님 같지는 않았다. 육환장을 짚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단주를 쥐고 있었다. 장삼은 바닥에 끌리듯 주루루 흘러내렸다.
  "에그머니나! 스님이 계셨군요"
  헌정 왕후는 불안했다. 노승이 자신의 소변 보는 모습을 훔쳐보았으리라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무 아미 타불 관세음보살"
  노승의 염불하는 소리를 들으며 헌정 왕후가 물었다.
  "스님은 어디에 계시오며 법호는 어찌되시는지요? 행여 조금전 저의 행동을 훔쳐 보신 것은 아니지요?"
  "훔쳐 본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다가 우연히 봤을 뿐입니다."
  "보셨다구요?"
  헌정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승이 말했다.
  "노승은 묘향산 보현사에 머물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녁 공양을 끝내고 서정에 들었더니 문득 이 산에서 오색찬란한 서기가 하늘로 치솟는 것이 보였습니다.하여 선정에 든 채로 이곳에 몸을 나타낸 것입니다. 소승이 이제 생각해보니 이는 왕후께서 아기를 가지실 태몽을 꾸고 계신 것이라 봅니다."


  헌정 왕후는 깜짝 놀랐다. 묘향산서 송악까지의 거리도 거리려니와 그 먼 곳에 몸을 나타냈다고 하는 노승의 신통묘술에 열린 입을 다물 줄 몰랐는데,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과 왕후임을 알아보는 데 있어서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게다가 태몽이라고 했잖은가.
  "제가 꿈을 꾸고 있었다구요? 그리고 그것이 태몽이라고요? 저는 지아비가 세상을 떠나고 혼자 사는 박복한 여인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왕후라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노승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왕후께서는 장차 이 나라를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 놓을 훌륭한 성군을 낳으시게 될 것입니다. 부디 옥체 보중하시고 가볍게 처신하지 마옵소서. 부처님께서 특별히 점지해 주시는 아기이니 잘 기르십시오. 훗날 영화를 한 몸에 누리시게 될 것입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말을 마치고 노승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한정 왕후는 노승을 부르다 자기 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안종이 앉아 있었다. 그녀가 스님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안종은 손수건을 꺼내어 헌정 왕후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헌정 왕후마마, 무슨 좋지 않은 꿈이라도...?"
  헌정 왕후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그냥 좀..."
  둘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안종은 절에 올때마다 소용되는 물품들을 가지고 왔으며, 헌정 왕후도 그 답례품으로 소장하고 있던 비단 병풍과 도자기 등을 선물하곤 했다.
  하루는 헌정 왕후가 안종에게 말했다.
  "저는 아이를 갖고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될 수 있겠어요?"
  그녀의 음성은 젖어 있었다. 꼭 꼬집어 표현할 수 없지만 그녀의 갈구하는 욕망이 밖으로 드러나고 있어다. 안종은 짐짓 딴청을 부렸다.
  "헌정 마마 그것이 어찌 불가능한 일이겠습니까? 팔자를 고치시면 되겠지요. 개성에는 훌륭한 젊은이들이 많이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중매를 서드릴까요?"
  하지만 안종의 손은 이미 헌정 왕후의 손을 아래 위로 포개 쥐고 있었다. 그녀는 손이 안종의 두 손바닥 안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았다. 거기에 불꽃이 일고 있었다.
  "안종"
  헌정 왕후가 와락 안종의 품으로 달려 들었다. 
  "안종! 꼭 껴안아 주세요. 그동안 너무 외로웠어요. 안종! 사랑해요 안종!"
  안종은 헌정 왕후를 꼬옥 껴안았다. 오랫동안 갈망해 오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탁자 위에 앉으신 미타, 관음, 세지의 삼존불이 두 사람을 축복하고 있었다.
  초겨울의 바람이 문지방을 넘어 들이닥쳤다. 밖에서는 풍경이 요란스레 울어 대고 있었다.
  "헌정! 나도 그대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오? 이제 우리들의 멋진 미래를 설계합시다. 헌정. 내 말 듣고 있소?"
  헌정 왕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약간 끄덕거렸다.
  "사랑하오, 헌정! 당신, 아기를 갖고 싶다고 했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 거렸다. 그러면서 안종의 허리를 감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가슴이 참 넓은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행복감에 젖어들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그녀는 헌애 왕후와 함께 쌍둥이처럼 자랐다. 두 자매가 너무도 다정하고 또 미인이어서 부모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흐믓해 했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 황보씨는 언니인 헌애보다도 헌정을 더 사랑했다. 헌애는 시샘 덩어리인데 비해 헌정은 마음이 꽤나 넓었고 언짢은 일에도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었다.
 헌정은 어린 마음에도 그들의 결혼이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왕실에서는 당연히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배워 왔기에 그렇게 섭섭하지도 않았다.
  섭섭하다는 느낌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었다. 시샘이 많은 언니였지만 그래도 말 동무가 되어 주었고 때로는 동생인 헌정을 위해 거친 일 같은 것은 앞을 가려주기도 했다. 그런 언니가 곁을 떠난다는게 여간 섭섭하지 않았다.
  언니 헌애가 시집을 간지 5년, 헌정의 나이도 열세살이 되었다. 경종은 헌정을 제2왕후로 맞았다. 그렇다고 그것이 전적으로 경종의 생각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왕실에서 헌정을 제2왕후로 맞이해야 한다는 강력한 제의가 있었으므로 그를 받아들인 것 뿐이다.


  경종은 헌정을 부인으로 맞이하기는 했지만 항상 헌애 곁에서만 맴돌았다. 헌애의 질투심이 경종으로 하여금 헌정과 가까이 할 수 없게끔 만들었고, 또한 경종은 질투심이 강한 헌애에게 매력을 느꼈다. 경종은 늘 생각하고 말했다.
  "너무 지나쳐도 문제가 있겠지만 여자가 질투심이 없다면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질투심이 없다는 것은 무관심이다. 사람 사이에 무관심처럼 무섭고 황당한 것은 없다. 사랑만 사랑이 아니라 미움도 사랑이다. 정말 미워하는 것은 무관심이다."
  두 사람은 깊이 사랑했지만 헌정은 언제나 외로웠다. 헌애의 감시도 감시려니와 경종은 숫제 헌정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언니에 대한 미움이었다. 가끔씩 경종을 원망해 보려 했지만 그 원망의 화살은 항상 끝에 언니에게 맞곤 했다.


  어느날 경종은 헌애 왕후와 심한 말다툼을 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였다. 궁녀의 수를 줄이고 궁녀들과의 만남은 물론 어떤 대화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헌애의 주장 때문이었다.
  궁녀의 관리는 왕후가 책임자였다. 그렇다고 왕후 마음대로 그 숫자를 줄이거나 왕의 행동까지 제약할 권리는 없었다. 왕의 행동이나 왕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대로가 법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제1왕후라 하더라도 행동과 언어까지 제약을 하고 질투를 하는 데는 경종으로서도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경종은 홧김에 헌정 왕후의 별궁으로 향했다. 그는 헌정 왕후를 안으면서 비로소 자신이 왕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헌애에게만 매여 살아온 자신이 매우 어리석었음을 알게 되었다. 헌애 왕후 못지 않게 헌정 왕후도 아름답고 매력있고 성숙한 여인임을 알았다.
  그때 헌정은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다. 경종에게 안기면서 그녀 또한 지금까지 언니에게 남편을 빼앗겨 온 자신을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는 언니에게만 양보지는 않겠다는 굳은 마음을 먹었었다.
  그후 경종은 곧바로 승하했다. 헌정 왕후로서는 그날 밤 경종의 행차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헌애는 헌애대로 헌정을 원망하고 미워했다. 그것은 경종이 헌정에게 다녀온 며칠 뒤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에 그 책임은 헌정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10여 년, 그녀는 경종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남자를 알게 되었고 남자의 넓은 가슴과 억센 팔이 그리웠다. 경종은 만나기 전에는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는데 그날 밤 그 일이 있고 나서는 정말이지 단 하룻밤도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헌정은 안종의 품에서 속삭였다.
  "안종! 우리 밖으로 나가요. 여긴 법당이잖아요."
  "그렇게 합시다. 헌정! 오! 내 사랑스런 헌정!"
  두 사람은 자주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 헌정은 헛구역질을 했다. 날짜를 꼽아 본 헌정은 비로소 그것이 임신 후에 나타나는 입덧이라는 현상임을 알았다.
  헌정은 안종을 불러 말했다.
  "안종, 아무래도 제가 임신을 한 것 같아요. 헛구역질을 하고, 신음식이 먹고 싶어요."
  "그것 참 잘 된 일이오."
  "잘 되다니요. 우린 지금 부부 사이가 아니잖아요? 만일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과부가 아기를 가졌다고 난리가 나게 될 텐데요. 어쩌지요? 사실은 그토록 원하던 아기를 갖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걱정이 앞서니 말예요."
  듣고보니 헌정의 말이 맞는 듯했다. 안종은 그녀를 소실로 맞아들이기로 마음 먹고 부인에게 털어 놓았다. 그러나 부인은 의외로 완강했다. 안종의 부인은 두 사람의 관계를 이미 벌써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하는 마음으로 지내온 터요, 또한 남편 안종의 명예를 위해서도 떠벌릴 일이 아니었기에 참고 또 참아 온 것이었다.
  그러나 안종이 그녀와 관계를 맺어 아이를 배었다는 데에는 지금까지 자신이 꽤나 관용스런 여자였다는 생각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느꼈다. 부인은 남편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남녀관계에 대한 배신감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장래에 대한 불안까지 겹쳐 있었다. 언제 그녀 자신이 제 2선으로 밀려나게 될 지 모르는 일이었다.
  안종의 부인은 길길이 뛰었다. 도저히 임신만큼은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애를 지우지 않으면 갈라서자고까지 했다. 안종은 부인을 달랬다. 때로는 협박도 했다. 부인이 그토록 아이가 없어 적적해 하던 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니냐고도 했다. 안종보다 부인이 더 아이를 원하기는 했었다. 심지어 부인은 안종에게 양자를 들이자고까지 했었다.
  그런데도 부인은 완강했다. 양자를 들이는 일은 남편의 외도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남편의 씨앗이 아니더라도 사랑하며 기를 수가 있다는 거였다. 오히려 남편의 친자식은 자기와의 관계에서 얻어진 것이 아닌 이상은 모두 부정한 관계로부터 생겨난 것이므로 용서할 수도 사랑할 수도 기를 수도 없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몇 달이 흘러갔다.
  고려 조정은 경종이 뒤를 이어 경종의 친동생이던 성종(981--997 재위)임금이 즉위했다. 경종의 병이 악화되자 위를 동생에게 넘기고 며칠 뒤 경종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안종의 부인 측근들이 고소를 하여 조정에 알려졌고 성종은 안종을 제주도로 귀양을 보냈다. 성종에게 있어서 안종은 숙부였지만 공적인 입장에서는 신하이기도 했다. 안종은 하는 수 없이 귀양길에 올랐다.
  또한 안종의 부인은 안종의 방 앞에 섶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질러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헌정 왕후는 기절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왕륜사에서는 스님들이 헌정 왕후를 간호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헌정 왕후의 친정에 연락을 취하고 조정에도 알렸다.
  그녀는 만삭이 된 배를 부여안고 궁으로 들어가는 가마에 올랐다. 가마가 왕궁에 거의 도착할 무렵, 그녀는 갑자기 산기를 느끼면서 가마를 세우게 했다. 시녀들이 달려오고 하여 아기를 낳았으나 그녀는 산고를 이기지 못해 그 길로 눈을 감고 말았다.


  한편, 헌애 왕후는 남편 경종이 승하하자 두 살된 아들 '송'을 길렀다. 송은 나중에 목종(997--1009 재위)이 되는데, 어려서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다 보니 성격상의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헌애 왕후는 질투심이 많고 포악하기로 소문이 났다. 그녀는 거칠 게 전혀 없었다. 
  그녀는 자연히 외간 남자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남자 사냥은 나이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았으며 빈부귀천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조건 잘생기고 건강한 사내라면 주저하지 않았다.
  성종도 그의 동생이자 형수인 헌애 왕후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다. 얼마나 외롭고 적적했으면 그러랴 싶었다.
  그러면서 헌애 왕후가 남자 사냥하는 것을 은근히 도와주기도 했다. 그만큼 고려 초기의 왕실은 혹 어느 때에 있어서는 썩을 대로 썩기도 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송이 열여덟 살 나던 해, 성종이 병을 얻어 세상을 뜨고 그 자리에 송이 나아가 목종이라 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목종은 집권을 하기는 했지만 정치보다는 궁녀들과 놀아나기에 급급했고 정치는 자연 헌애 왕후가 도맡아 했다.
  태후가 된 헌애 왕후는 천추단이란 별궁을 새로 건축하고 그곳에 거처하면서 자칭 천추 태후라 칭했다. 그녀에겐 태후가 되기 전부터 깊이 사귀어 온 남자가 있었다. 그는 곧 그녀의 외사촌인 김치양이었다.(고려사에서는 헌애 왕후와 헌정 왕후가 어머니의 성을 따라 황보씨라 했다고 했는데 또 다른 사서에서는 그녀들의 외사촌이 김씨라고 했다.)
  김치양은 헌애 왕후가 사귀어 온 뭇 사내들 중에서도 가장 야성적이고 사내다운 남자였다. 그러나 김치양에게는 또 다른 속셈이 있었다. 그것은 헌애 왕후를 이용하여 한몫 단단히 거머쥐겠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김치양은 간교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김치양을 가까이 한 헌애 왕후도 그와 힘을 합해 권력을 손아귀에 넣어 보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태후가 된 헌애 왕후, 즉 천추 태후는 어느 날 김치양을 궐내로 불러들여 누구도 배석하지 못하게 한 뒤 은밀히 단독회담을 가졌다.
  "부르셨사옵니까, 태후마마"
  "어서 오시오. 우리는 지금 둘 뿐이니 사석이나 마찬가지요. 그러니 태후라 부르지 말고 그냥 헌애라 불러주시오."
  "황공하옵니다. 태후마마"
  태후가 교태를 부리며 김치양을 향해 의자를 당겨 가까이 갔다.
  "아이! 그렇게 부르지 말래두."
  김치양이 알아차렸다는 듯 태후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고 그녀를 번쩍 안아 침소로 향했다.
  둘은 새로운 역사를 진행했다. 김치양과 태후와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그들은 항상 낮 시간을 택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남의 의심을 불식시키기에 좋았기 때문이었다.
  천추단은 그러기에 태후의 영이 없는 한 그 어느 누구도 문을 두드릴 수 없었으며 설사 임금이라 해도 그곳만은 신성불가침의 처소였다.
  목종은 보위에 오르기 전부터 태후와 김치양과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태후가 너무나 완강했기 때문에 왕이 되어서도 태후의 사생활은 특별히 보호했고, 자신도 거기에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목종은 김치양을 내쫓고 싶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신하들의 원성과 상소가 빗발치듯 했기 때문이었다.
  "주상전하, 김치양은 간교하기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속히 내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염려되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주상전하. 신이 알기로도 그는 태후와 모종의 모의를 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전하"
  "전하, 전하께오서는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이옵니다. 사사로운 정에 매여 국사를 그르치지 마옵소서."
  "황공하여이다. 전하."
  "통촉하시옵소서."
  대신들의 얘기를 다 듣고 난 목종은 부복한 신하들을 둘러 보며 말했다.
  "짐이 어찌 공과 사를 분간하지 못하겠소. 하지만 태후는 짐의 모친이며, 김치양은 태후가 가장 아끼는 인물인데 어떻게 그를 내칠 수 있겠소. 경들은 들으시오. 내 비록 보위에 올라 국사를 논하는 임금이 되었지만 임금이기 이전에 어엿한 한 인간이며 인간인 이상 어머니를 마음 상하게 하는 불효를 저지를 수는 없소. 그러니 경들은 이 일을 다시 거론치 마오."
  대신들의 직언은 다시 시작되었다.
  "전하 진정한 효도는 어머님으로 하여금 바른길로 가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 하옵니다. 전하. 우선은 마음이 상하시더라도 장래를 위해서는 일깨워 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도 부모를 바른길로 인도함이 가장 큰 효라 하였습니다. 전하, 부디 통촉하시옵소서."
  "통통촉초하하시시옵옵소소서서..."
  목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그만들 하시오. 그만들 하라 하지 않았소. 다신 짐 앞에서 태후와 태후에 관계된 일들을 거론하지 마시오. 어험."
  자리를 뜨는 목종을 보며 대신들은 통촉하라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그러는 가운데 태후는 김치양의 아기를 임신했다. 임신을 하고난 태후는 그 사실을 김치양에게 알렸고, 김치양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태후마마, 감축하옵니다."
  "어허, 사석에서는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황공... 헌애, 정말 우리의 아기를 가진 것이오?"
  태후가 눈을 곱게 흘기며 말했다.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얘긴데 내 동생 헌정의 아들 '순'이 지금 궐내에 있잖소?"
  "그렇지요. 지금 태자궁에 있지요.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순을 내쫓을 궁리를 한 번 짜보시오. 순이 있는 한 우리의 아기가 태어난다 하더라도 왕위에 오르기는 힘들지 않겠어요? 호호호!"
  김치양은 태후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나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그렇군요. 아하! 그러니까..."
  김치양은 태후의 귀에 입을 대고 뭐라고 소근거렸다. 태후는 입을 벌리며 의미 깊은 미소를 살짝 흘렸다. 고개를 끄덕였다. 김치양이 천추단을 빠져나왔고 태후는 태후대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뭔가 큰 일이 한 번 일어나고야 말 것 같았다.
  순의 국호는 대량원군이었다. 순은 눈치가 빠른 소년이었다. 그의 나이 열두 살, 여태껏 눈치 하나만으로 살아온 그가 김치양과 태후의 모의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내쫓기기보다는 내 발로 걸어나가는 것이 좋겠다. 우선은 몸을 피하고 훗일을 도모해야겠다.'
  순은 궁을 빠져나왔다. 그는 개경 남쪽에 있는 숭교사로 향했다. 숭교사에서 화곡 스님을 은사로하여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화곡 스님은 순에게 진수라는 법명을 지어 주었다.
  진수스님은 남달리 총명했다. 그는 남들이 10년 걸려 할 공부를 3년 만에다해 마쳤다.
  하지마 진수스님의 총명함은 또 하나의 불씨를 안게 되었다.
  천추 태후가 숭교사에 사람을 보내어 진수스님의 일거 일동을 감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자객을 보내어 암살하려고 까지 했다.
  그때마다 스님들은 방문한 사람들에게 어떤 직감을 느끼고 경계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자객이 오는 날은 하루 전이나 또는 며칠 전부터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시어 암시를 주곤 했다. 암시라는 것이 그냥 어떤 느낌만이 아니었다. 부처님은 몇날 몇시 어느 장소라는 것까지 분명히 가르쳐 주시곤 했다. 그때마다 진수스님은 땀을 흘렸고 부처님의 암시에 따라 난을 피하곤 했다. 진수스님은 어느 날 화곡스님의 부름을 받고 조실에 들어갔다.
  "부르셨습니까? 큰스님."
  화곡스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스승과 제자로서가 아닌 왕자와 승려의 신분에 의거해 말씀드리지요. 왕자께서는 이곳을 떠나십시오."
  "떠나다니, 어디로 말이오이까?"
  "소승이 이미 연락을 은밀히 취해 놓았습니다. 한양 가까이에 삼각산이 있고 그 산에 아주 조그마한 암자가 있습니다. 현재 내 도반인 진관스님이 주석하고 있습니다. 하오나 그 스님은 왕자님의 신분을 잘 모르고 있으니 행여 옥체를 보중하셔야 합니다. 어서 준비하시지요. 믿을 만한 스님을 뽑아서 모시고 가도록 이미 조처해 놓았습니다."
  진수스님은 숭교사를 떠났다. 한양까지는 꼬박 사흘이 걸렸다. 오랜만에 개성을 떠나는 그는 만행하는 기분을 만끽했다.
  (운수납자의 멋은 바로 이런 데 있었구나. 가능하다면 나는 운수의 길을 계속 걸으리라)
  삼각산 암자에 도착하니 진관 노스님이 반겨 맞았다. 이 암자는 나중에 신혈사라 불리게 된다. 삼각산 자락에 자리한 절은 평평하고 넓은 공간에 아늑하게 서 있었다. 이때 진수스님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어서 오시게, 진수스님. 화곡스님으로부터 자네가 온다는 말을 들었네."
  "큰스님 앞으로 잘 지도해 주십시오. 업이 두터운 중생입니다."
  진관스님은 화곡스님으로부터 이 젊은 승려가 왕자라는 귀뜸을 받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화곡스님과의 약속이 있어서 짐짓 모르는 체했다. 그것이 왕자인 진수스님을 보호하는 길이었다. 원체 어수선한 시절이고 보니 절집 안에 어떤 신분을 갖고 잠입해 들어온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행여 왕자라는 신분이 노출된다면 승려나 신도로 가장하여 언제 어디서 해를 끼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진관스님은 진수스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절은 이처럼 협소하고 누추하기 이를 데 없네. 앞으로 서로 탁마하며 대중들과 잘 어울리도록 하게나."
  진관스님의 친절한 호의에 진수스님은 참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아버지 얼굴을 모르고 자란 그는 진관스님에게서 문득 아버지를 느꼈다.
  "우리 아버지 안종도 이 노스님처럼 매우 인자한 모습일 거야. 으음!"
  안종은 그때도 유배지인 제주도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천추태후로부터 종신형을 선고 받았었다. 제주도에서의 생활은 비참했다. 무엇보다 철저한 감시가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침에서 저녁까지, 저녁에서 아침까지 항상 교대로 너댓명이 감시를 하곤 했다.
  끼니라고 해 보았자 남자 시종이 만들어 주는 것으로 잡곡밥에 반찬 한 가지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집에서 3백보 이상 떨어진 곳은 나갈 수 가 없었으며 옷가지는 입고 있는 것 말고는 한 가지가 더 있을 뿐, 그것도 이미 15년 남짓 걸치고 있다보니 성한곳 보다는 누덕누덕 기운 곳이 많았다.
  다만 그에게 허락된 것은 글을 쓰고 서책을 뒤적이는 것이었는데 그도 철저한 검열을 받곤 했다.
  그는 언제나 아들의 소식을 기다렸다. 송도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아들의 이름이 '순'이라는 것과 열두 살에 궁에서 쫓겨난 일, 그래서 개성 성내에 있는 숭교사에서 중이 되어 수도에 전념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또한 헌정 왕후가 순을 낳고 세상을 하직했다고 하는 것도 소식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는 가끔 혼자 넋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다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허공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어쨌든 살아만 있어다오. 순아! 중 노릇도 좋고 속인 노릇도 좋다. 아무려나 굳세게 살아다오 내 비록 나라에 죄를 얻고 이곳에 와 있다만 그래도 너에게 희망을 걸고 살아간단다."
  그는 아들 순이 숭교사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어느 절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진수스님은 진관스님이 아버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아무리 총명하고 부처님의 일대시교를 두루 섭렵한 대종장이었다 하더라도 진수스님은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신체적으로는 숙성한 편이어서 어른 못지 않았지만 아직 코밑이나 턱에 수염이 날 나이도 아니었고 정신연령으로 보더라도 막 사춘기에 접어 든 소년이었다.
  숭교사에 머물 때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많이 했었는데 이곳 삼각산에서는 진관스님을 보며 귀양 가 있다는 아버지 안종을 떠올렸다.
  신혈사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가 하는 일은 때때로 진관 노스님을 찾아가 공부한 것을 점검받는 일 외에는공양을 짓고 대중들의 수발을 들거나 땔나무를 하고 빨래를 했다.
  진관스님은 일부러 진수스님에게 잡일을 도맡아 하도록 했다. 주위의 대중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하는 일도 중요했지만 진수스님 자신이 스스로 대중생활에 깊이 젖어들어 왕자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진주는 뻘밭에 떨어져 있어도 역시 진주였다. 진수스님이 신혈사에 머물기 이태, 대중들은 그의 총명함과 언어, 행동에서 보통사람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느끼곤 했다.
  진관스님은 수미단, 즉 불단 밑에 지하땅굴을 마련했다. 그리고 믿를 만한 시자 몇 사람을 골라 보안유지에 철저하도록 일렀다. 진수스님은 그 땅굴 속에 갇혀 지내야 했다. 산문밖에는 항상 주야로 망을 보게 했고 드나드는 사람들은 은근히 경계하여 살펴보게하는 진관스님의 배려에 진수스님은 때로 너무나 고마워 눈물을 펑펑 쏟아내었다.
  땅굴 속에서 또 한 해가 가고 진수스님의 나이도 열여덟이 되었다.
  한편 조정은 조정대로 한참 회오리바람을을 일으키고 있었다. 목종은 천추 태후와 김치양의 눈에 띄는 부정부패로 인해 골치를 앓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그들의 방탕한 생활이 목종에게 커다란 짐이 되었고, 급기야는 그로 인해 심장병에 걸렸다.
  목종도 천추 태후의 아들이었다. 하지마 김치양에게 푹 빠져 버린 천추 태후는 김치양과 모반을 기도했다. 그러나 강조가 이를 알고 미리 선수를 쳐서 천추 태후와 김치양을 제거하고 목종마저도 폐위시켰다.
  강조는 정변의 공신들과 논의한 끝에 숭교사를 찾아 화곡스님에게 순을 보위에 나아가게 한 사실을 얘기했다.
  "그래서 '순'을 찾으러 왔습니다. 스님께서는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화곡스님이 말했다.
  "그분은 지금 불제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소승이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왕위에 나아가지 않으려 하실 것입니다."
  "아무튼 일러 주십시오. 그리고 어지러운 고려 조정을 생각하시고 불안한 백성들의 위해서 스님께서 꼭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말씀드리지요. 대량원군 순 왕자께서는 지금 삼각산의 조그마한 암자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의 법명은 진수라고 하지요. 소승이 그 절의 조실인 진관스님에게 서찰을 써드릴 터이니 갖고 가서 그 스님에게 드리면 알아서 안내해드릴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화곡스님"
  화곡스님은 지필묵을 갖추어 진관스님과 진수스님에게 각각 편지를 썼다.
  왕을 모실 일행이 삼각산 신혈사에 이르러 화곡스님의 서찰을 내보이자 진관스님은 일행을 지하땅굴로 안내했다.
  "전하! 어서 보위에 나아가소서. 그간 저희가 불충하여 재대로 모시지 못하온 죄 한없이 크나이다."
  진수스님은 서찰을 읽어 보고서야 상황을 짐작했다.
  "나는 이미 불문에 몸을 담고 불도를 닦기 시작한 지 여섯해가 지났소. 부처님은 6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는 못할망정 불문을 떠나 시끄러운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소"
  "전하! 하오나 조정과 백성을 생각하셔야 하옵니다. 신 등이 알고 있기는 불법이란 출세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보위에 오르신 뒤 이 나라 불교를 위해 힘을 기울이셔도 늦지 않은 것이옵니다. 부디 가마에 오르소서."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진수스님은 승복을 벗고 그들이 준비해 온 곤룡포를 걸쳤다. 이제 그는 겉으로는 완전한 왕이었다. 남은 것은 그를 만천하에 공포하는 즉위식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진관스님의 깊은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며 작별을 고했다.
  "조실 큰스님, 큰스님의 기지와 배려가 아니었다면 제가 어찌 살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곳에 오면서부터 화곡 스님과 조실 큰 스님과의 은밀한 기지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습니만 저 또한 두 분들의 뜻을 져버리지 않고자하여 이제껏 짐짓 모르는 체 살아왔습니다."
  진관스님은 왕자가 눈치챘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왕자의 얘기를 듣고서야 역시 그는 한 나라를 다스릴 자격이 있다고 감탄했다.
  왕자는 왕위에 올라 현종이라 하였고 그가 머물던 땅굴을 신룡굴, 절 이름을 신혈사라 고쳐 부르게 했다. 그리고 신혈사 인근에 대가람을 세워 진관스님으로 하여금 머물게 하고 스님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부르게 했다.
  진관사는 현재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삼각산 북쪽 기슭에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본사 조계사 직할사암이다. 고려와 조선을 통해 숱한 질곡의 역사를 견뎌온 진관사는 6.25때 나한전을 비롯 3동만 남기고 전소된 것을 1964년 최진관 비구니스님이 부임하면서 도량을 새롭게 가꾸어 현재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나한전, 독성각, 칠성각, 홍제루, 종각, 일주문, 선원, 큰방 등을 고루 갖추고 있다. 그리고 대웅전에 봉안된 본존불은 현종이 은거할 때 모셔져 있던 불상으로 현종을 구해 주었다하여 비록 문화재로는 지정되지 않았으나 깊은 깊은 역사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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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사

서울 은평구 진관길 73 (진관동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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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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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반도 내소사 대웅전 청문대사 선우화상 대호선사 이야기

   내소사 법당에 얽힌 이야기 
  변산반도 한 산기슭에 자리한 내소사 법당 대웅전은 보물 제 21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한 개의 포가 모자라고 벽화는 그리다가 중도에서 그만둔 채로 내려오고 있다.
  이 대웅전은 조선 인조 11년(1633)에 내소사 조실 청문대사가 증축하였다. 청문대사는 이법당을 증축한 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면 이법당은 어째서 한 개의 포가 모자라며, 벽화는 그리다 말았을까.
  청문대사가 내소사로 부임한 지도 어언 3년이 지났다., 퇴락해 가는 대웅보전을 볼때마다 그는 마음이 아팠다. 어서 번듯한게 법당을 지어 부처님을 편히 모시고 싶었다. 그는 설계를 했고 화주를 뽑아 법당 건립기금을 마련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금이 조성되고 모든 설계가 끝났다 해도 이를 시공할 만한 목공이 없이는 건립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청문대사는 목수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기 1년, 그러나 목수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청문대사의 거동이었다.


  내소사 주지 선우화상은 청문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젊은 스님이었다. 선우화상은 아무래도 청문대사가 수상했다. 청문대사는 목수를 기다리되 절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꼭 일주문 밖에까지 나와서 기다리다 들어가곤 했다.
  "큰스님,이젠 들어가시지요. 큰스님께서 목수를 기다리신지 벌써 한 해가 다 되어 갑니다. 하지만 목수는 오지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대웅전은 언제 짓겠습니까? 내 일은 좀 미숙하기는 해도 제가 직접 목재를 구해오고 목수를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들어가십시오."
  별로 말이 없던 청문대사가 약간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허! 젊은 사람이 말이 많구나. 모든 일에는 다 거기에 맞는 때의 용처가 있는 법이니라."
  "그리고, 목수를 기다리시려면 절에서 기다리셔도 될 터인데 구태여 여기까지 나올실 건 뭡니까?"
  "허! 말이 많대두. 이 사람아, 내가 목수를 기다리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나오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느니."


  선우화상은 호기심이 일었다.
  "무슨 이유가 있으신지요?"
  청문대사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부쩍 궁금증이 인 선우화상은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이유를 물었다. 똑같은 질문을 일곱 번이나 했을 때 조실 청문대사는 말했다.
  "내가 매일 나오는 것은 백호를 지키기 위해서니라. 목수가 올 때에 해를 당해서는 안 될 테니..."
  청문대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크고 늙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갈기는 희어서 그놈이 방금 전에 청문대사가 말한 백호임을 알 수 있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호랑이의 눈빛은 석양의 붉은빛을 받아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청문대사는 주장자를 들어 호랑이를 제지하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지나치려 했다.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청문대사를 향해 으르릉댔다.
  "아직은 안 된다. 나는 할 일이 남아 있다. 내가 우리 내소사 대웅보전을 준공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청문대사는 주장자로 길 옆에 우뚝 솟은 소나무 허리를 쳤다.
  "딱!"
  "어흥!"
  호랑이는 주장자 부딪치는 소리에 맞춰 한 번 으르렁대고는 어슬렁거리며 사라졌다. 청문대사는 법당으로 향했다.
  청문대사는 법당 뜰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단주를 꺼내어 굴리고 있었다. 달싹거리는 입술로 보아 염불을 하고 있음에 틀림 없었다. 한참을 염불삼매에 들어있던 조실 청문대사는 주지 선우화상을 불렀다. 선우가 다가가자 청문대사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내일부터 일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너는 내일 날이 밝거든 일주문 밖에서 나그네를 기다려라. 그리고 무거운 짐을 들고 올 것이니 받아들고 오너라."
  선우화상은 생각했다.
  '어떻게 내일 새벽 나그네가 올 것을 미리 알 수 있지? 만약 그렇다면 큰스님은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이 있는 것이다. 하여간 시키는 대로 해보자.'
  선우화상은 대답했다.
  "어떻게 생긴 나그네이며 옷은 어떻게 입었습니까? 그리고 나이는 어느 정도나 먹었는지요?"
  "내일 그곳에 나가 보면 알게 되리."


  다음날, 새벽 예불을 끝내고 청문대사가 시킨 대로 일주문밖에 나간 선우화상은 가슴이 철렁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뭔가 늘씬하게 생긴 동물이 일주문 기둥에 옆구리를 대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다시 그곳을 살펴 보니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이미 히끄무레하게 아침이 열리고 있었다.
  '참 이상도 하지! 아까는 분명 무슨 동물 같았는데...'
  하얀 바지 저고리에 수건을 머리에 질근 동여맨 남자 곁으로 가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내,절에 들어와 부처님을 시봉한 지 어언 스무해건만 사람을 보고 동물로 착각하여 기절을 하다니, 아직 공부가 덜익은게 분명해. 생사를 초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6년 고행 끝에 나고 죽음을 해결하셨다는데 나는 그 세 배가 넘는 20여 년을 수행하고도 이 지경이니, 쯧쯧."


  선우화상이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사내가 눈을 떴다. 선우화상이 쭈뼛거리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소승은 내소사 주지로 있는 선우라고 합니다. 우리 절 조실이신 청문 큰스님에서 마중을 보내셔서 이렇게 나왔습니다."
  사내는 눈만 꿈벅꿈벅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선우가 걸망을 달라고 하자 사내는 두 개의 커다란 걸망 가운데 하나를 선뜻 내주었다. 뭐가 들었는지 생각보다 묵직했다. 목수라면 아무래도 연장이 들어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손님은 어디서 오시는 뉘십니까?"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
  "이 걸망 속에는 뭐가 들었길래 이리도 무겁습니까? 물론 연장들이겠지요?"
  사내는 얼굴만 돌릴 뿐이었다.


  "내소사는 처음이십니까?"
  싱긋이 웃을뿐이었다. 선우화상은 끈질기게 물었다. 청문대사도 결국 무릎을 꿇린 그의 고집이었다.
  "큰스님과는 잘 아는 사이십니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일주문에서 법당 앞까지 도며 선우화상은 연신 질문을 퍼부었고, 그는 여전히 말 한마디 없었다. 은근히 약을 올리고 벙어리에 귀머거리가 아니냐고까지 자존심을 건드렸지만 사내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선우가 약을 올리고 질문을 할 때마다 그가 표정을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귀머거리는 아닌 게 분명했다.
  나중에 선우화상은 자신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자신이 미워 미칠 지경이었다. 상대방은 일반인인데도 그처럼 대단한 인내력을 지니고 있는데, 자기는 소위 수도 하는 사람이면서 그렇게 채신머리없이 지껄여 댄 것이 미워 죽고 싶을 정도였다. 


  홀로 방에 들어와 생각에 잠긴 선우화상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제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승려이기 이전에 그도 사내였다. 더욱이 수행자로. 사내대장부가 말에 책임을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녀자만도 못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냥 처음에 인사 몇 마디로 끝냈어야 하는데... 나중에 그를 약올리고 욕하고 하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 옳은데. 허! 그것 참,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밉네.'


  사내는 그날 하루를 쉬고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대웅전 지을 나무를 베어왔다. 기둥과 서까래 대들보감을 구해 왔다. 나무 구입이 끝나자 그는 목침만한 크기로 나무를 잘랐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는 목침만을 잘랐다. 열흘이 가고 스무 날이 가고 한 달이 가도 그는 목침만을 잘랐다. 선우화상은 사내가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청문대사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사내는 표정 하나 없었다.
  그는 다섯 달 동안 목침을 잘라 댔다. 다섯 달이 지나자 그때에야 비로소 톱을 놓고 대패를 들었다. 목수는 끊임없이 대패질을 했다. 그는 삼매에 들어있는 수도승보다도 더 엄숙했다.

 

 부처님이 삼매에 들어있는 수도승보다도 더 엄숙했다.
 부처님이 삼매에 들어있는 모습이 바로 저목수와 같을 덕이라 여겨졌다. 그는 몸을 움직여 대패질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참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법당을 짓겠다는 생각도, 나무를 다듬는다는 생각조차 초월한 것 같았다. 물이 홈통을 흐르고 흘러 물레방아를 돌리는 것이라고 여겼다. 물은 물레방아를 돌린다는 생각도 자신이 흐르고 있다는 생각도 없이 물레방아를 돌리는 것처럼 목수도 그럴것이라 선우화상은 생각했다.


  목침을 다듬기 3년이었다. 선우화상은 참다 못해 한 마디 했다.
  "여보, 목수 양반! 목침 깎다가 세월만 다 가겠소. 법당은 언제 지으시려오?"
  선우의 물음에도 목수는 빙그레 웃을 뿐 말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목침 다듬는 일에 열중했다. 선우화상은 자기가 한 말에 대답이 없자 공연히 자존심이 상했다. 목수를 골려 주고 싶었다. 그는 목침 한 개를 슬쩍 감추어 버렸다. 수천 개의 목침 가운데 한 개 정도 감춘다고 알 리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엉청나게  깎은 목침을 다 세고 나서 목수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일할 때와 달리 그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깃들여 있었다, 연장을 다 챙기고 나서 땀을 닦은 목수는 청문대사를 찾아갔다.
  "큰 스님! 아무래도 저는 법당을 지을 인연이 못 되는 것 같습니다."
  그는 내소사에 온 지 3년이 넘어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선우화상은 그가 벙어리가 아니었음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그의 엄청난 인내력에 선우화상은 혀를 내둘렀다. 선우화상은 목수가 청문대사에게 한 말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다.
  청문대사가 물었다.
  "왜, 무슨 일이 있소?"
  "네, 목침 하나가 부족합니다. 아무래도 아직 저의 정성이 완전치 못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럼."
  선우화상은 깜짝 놀랐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하나가 모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왜냐하면 수천 개의 목침 중에서 한 개가 없어진 것을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일같이 목침을 점검했다면 또 모르되 목침을 자르기 시작하면서 다 다듬을 때까지 적어도 선우화상이 알고 있는 한, 한 번도 점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 목침을 자신이 몰래 숨겼다고 토로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청문대사가 손을 들면서 말했다.
  "가지 말고 법당을 그냥 짓도록 하시오. 목침이 한 개 모자라는 것은 그애의 잘못이 아니오."
  선우화상은 뜨끔했다. 청문대사가 이미 자기가 목침 한 개를 숨기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청문대사도 목수도 보통 인간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청문대사의 위로를 받은 목수는 다음날부터 법당을 짓기 시작했다.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중방과 도리를 얹고 대들보를 얹었다. 서까래를 놓았다. 그가 3년 남짓 자르고 깎은 목침도 모두 쓰였다. 
  법당은 며칠 내에 완성되었다. 기와도 얹었고 문도 달았다.
 닫집을 잇고 탁자를 만들어 내부 공간도 모두 완성하였다.
  법당이 완성되자 청문대사는 단청을 하고자 화공을 불렀다. 그때 청문대사는 대중들에게 공지사항 하나를 전달했다. 아니 그것은 불문율이었다.
  "화공이 오늘부터 법당 내부 단청에 들어간다. 따라서 화공이 법당 안의 단청과 벽화를 완성할 때까지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된다. 그것은 한 달이 걸릴 수도 있고 두 달이 걸릴 수도 있다. 명심하라. 절대로 들여다봐서도 안 된다. 내  말을 꼭 기억하라. 이유도 묻지 마라.
  선우화상은 묻고 싶었다. 식사 문제나 뒷간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하지만 이유를 묻지 말라는 조실 큰 스님 청문대사의 엄명이고 보니 물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화공은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도 전혀 밖에 나오지 않았다. 또 한 달이 갔다. 선우화상은 생각했다.
  '도대체 뭘 어떻게 그리는 거야? 화공은 식사도 안하고 대소변도 안보나? 설마 새로 짓는 법당 안에 변기를 들여 좋지는 않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림이 어떻게 그려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생리적 욕구를 어떻게 충족하고 배설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졌다. 선우화상은 그게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법당앞에는 늘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청문대사가 아니면 그 목수였다. 선우는 어떻게든 자신이 생각한 것은 꼭 이루고야 마는 고집이 있었다.

내소사 단청 소리

내소사 영산회개불

 

  법당 앞에 목수가 지키고 있었고 청문대사는 조실에서 교대할 때까지 쉬고 있었다. 선우화상은 꾀를 냈다.
  '음!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군.'
  선우화상은 목수에게 다가가 말했다.
  "조실 청문 큰스님께서 잠깐 오라십니다."
  목수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법당 앞을 떴다. 선우화상은 재빨리 법당 앞으로 다가가 문틈으로 내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봐도 벽화를 그리는 화공은 없었다. 그 대신 오색이 영롱한 한 마리의 새가 부리에 붓을 물고 물고 물감을 묻혀 단청과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호기심이란 본디 멈추기를 거부하는 법이다. 선우화상은 법당 문고리를 잡고 살그머니 당겼다. 법당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법당 안으로 한 발을 살짝 들여놓았다. 바로 그 때였다. 온 산천을 뒤흔들듯한 호랑이의 으르릉거림이 있었다. 선우는 그 자리에 기절해 쓰러졌고 새는 날아가 버렸다.


 선우화상이 정신이 들었을 때, 청문대사가 법당 앞에 죽어 있는 희고 큰 호랑이를 향해 법문을 설하고 있었다.
  "대호선사여, 나고 죽음이 본래 둘이 아닌 법인데 선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태어남이란 맑은 하늘에 한 점 흐름이 생기는 것과 같고, 죽음이란 그 구름이 맑은 하늘로부터 사라짐과 같도다. 그러나 흰구름 자체도 본래실체가 없는 법, 나고 죽음도 실체가 없다. 하지만 그대가 지니고 있던 그 영묘한 본성 만큼은 영원히 나고 죽음을 따르지 않고 홀로 빛나리라. 대호선사여! 그리고 그대가 세운 이 대웅보전은 길이 법연을 이으리라,"
  법당 중수가 끝나자 청문대사는 온 데 간 데 없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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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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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 불국사 창건 설화, 불교설화

 

불국사 전경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
  
  모두 여덟 개의 국보를 비롯하여 수많은 보물과 지방문화재, 중요문화재 등을 간직한 불국사는 신라 법흥왕 27년(540)에 처음 창건된 이래 진흥왕 36년(575)에 중창을 거치고 경덕왕10년(751)에 재상 김대성이 국가의 부흥과 부모의 행복을 위해 전당과 요사 70여 채를 짓고 석가탑,다보탑,청운교,백운교 등 27개의 석조물을 세워 어엿한 대사람이 되었다. 2천여칸이 넘는 거대한 사찰이 된 것이다.
  이 사찰은 신라의 장인들이 세운 게 아니고 아사달이라는 백제의 유명한 석공이 공사를 도맡아 했다. 아사달은 백제의 조정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아사달은  아사녀라는 아내를 두고 있었으나 지엄한 왕명을 어길 수 없어 홀로 떠나와 불국사 중 창불사에 전력했다.

 


  지아비를 떠나 보내고 홀로 남은 아사녀는 남장으로 변복하고 백제의 경계를 넘었다. 백제의 수도 공주에서 서라벌까지는 8백여 리나 되는 먼 길이었다. 그녀는 배고픔과 목마름도 잊었다. 오로지 남편인 아사달을 만난다는 꿈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보름 동안을 걸었지만 아직도 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아사달을 만나 보지도 못하고 중도에서 죽는 것은 아닐까? 아니야, 그럴 순 없어. 절대로 중도에서 죽어서는 안돼. 어떻게든 아사달을 만나야 해.'

 


  아사녀는 다시걸음을 재촉했다.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냇물을 건너면서도 거기서 아사달을 보았고 녹음이 우거진 산길에서도 떠오르는 것은 아사달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아사달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었다. 아사달이 없는 세상은 어둠이었다. 그녀는 두 살위인 아사달에게 시집을 왔다. 시집온 지 석 달 만에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아직 신혼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정이 들 대로 들어 있었다.


  아사녀는 그험한 길을 걸어 드디어 서라벌에 도착했다. 그녀는 아사달이 중창을 맡고 있다는 불국사 앞에 이르렀다. 울창한 소나무 숲 저편에 불국사가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더 다가갈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창과 칼을 들고 잡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저 절에서 공사를 도맡아 하는 사람이 제 남편 아사달입니다. 지어미가 지아비를 만나고자 하는데 구태여 안 될 것은 무엇인가요?"


  병사는 막무가내였다.
  "안 됩니다. 잡인을 금하라는 어명입니다. 여자는 더욱이 안 됩니다. 정 아사달을 보고 싶으면 이곳 연못에 비친 그림자를 보십시오. 당신의 남편 아사달이 석가탑을 세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게요."
  그녀는 연못가로 한걸음 다가갔다. 그러나 횐구름만 온 연못을 차지했을 뿐 석가탑도 아사달도 보이지 않았다.
  "아사달이 보이지 않아요. 석가탑도 보이지 않구요.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의 흰 구름 그림자만 있을 뿐이에요. 제발 부탁입니다. 지아비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저는 천리길을 걸어 공주에서 예까지 왔습니다"
  "다시 한번 들여다 보십시오. 반드시 석가탑과 그것을 조성하는 아사달의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댁이 아무리 사정을 해도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딱한 사정도 이해해 주십시오"
  오히려 병사쪽에서 애원을 해왔다.
  아사녀는 연못가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병사는 오래 서있는 것도 지쳤는지 선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녀는 이때다 싶어 불국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석가탑 국보 21호


  아사달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아사녀는 아사달을 붙잡기 위해 난간 가까이로 다가갔다. 환영이었다. 그는 아사달이 아니라 불국사의 스님이었다. 
  "스님,저는 공주에서 온 아사녀라 합니다. 저의 지아비 아사달이 이곳 불국사에서 석가탑을 세우고 있습니다. 한 번만 만나게 주선해 주십시오."
  스님은 단주를 든 손을 합장하며 말했다.
 "나무 관세음보살. 아사녀,그대의 애끓는 심정을 왜 모르겠소. 하지만 아직은 때가 이르오이다."
  "때가 이르다니요?스님."
  "연못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시오. 석가탑과 아사달의 일하는 모습이 분명 보일것입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아사녀는 연못으로 뛰어갔다. 연못을 아무리 들여다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그때 스님이 난간에서 말했다.
 "아사녀, 그대가 지아비 아사달을 만나려는 생각은 한낱 오욕에 불과하오. 오욕은 영원한 것이 못 됩니다. 진정 온갖 욕정을 모두 놓아버렸을 때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오. 그러니 자기 마음을 비우고 맑게 하는 기도를 계속하도록 가피하셔서 말이오."
  "관세음보살님이 가피?"
  "그렇소. 아사달은 마음을 텅 비우고 지금 석가탑을 쌓는데 온갖 정열을 다 기울이고 있소. 그대도 그대의 지아비 아사달을 따라 마음을 비우고 맑게 하시면 가능할 것이오."
  그녀는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경건한 마음을 가졌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힘있게 잡았다.


  "관세음보살님, 제 남편 아사달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관세음보살님은 모든 중생의 고통을 지혜로 살피시고 자비로 어루만진다 하셨습니다. 이 가엾은 여인의 소원을 들어 주옵소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어둠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했다. 어둠은 먼 곳으로부터 오는게 아니라 아사녀의 주변에서부터 먼 곳으로 퍼져 나갔다. 아사녀의 주위는 어두웠지만 아직도 먼 하늘은 희끄부레 열려 있었다. 별들이 시커먼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그녀의 기도는 계속되었다. 불국사 경내에 울려 퍼지는 경건한 목탁소리는 소나무 숲에 부딪치면서도 깨지지 않은 상태로 아사녀의 주위를 맴돌다 사라지곤 했다. 그녀는 염불삼매에 깊이깊이 빠져 들었다. 관세음보살이 아사달이 되었다가 관세음보살이 되고 다시 아사달이 되었다. 그녀는 관세음보살을 염했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아사달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의식은 점점 아스라해졌다.

다보탑 국보20호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고 나면 아사녀는 어김없이 동구 밖으로 나가곤 했다. 아사달이 일터에서 돌아오는 것을 마중하기 위해서였다. 뒷산 절에서는 저녁 예불 범종소리가 들려왔다.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잘거리는 동네 꼬마들의 웃음소리도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송아지가 어미를 찾는 소리가 끼어들기도 했다. 어둑어둑한 저편에서 아사달이 뛰어왔다. 그들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초저녁 어둠 속에서도 느낌으로 상대방을 알았다.
  "집에서 기다려도 될 텐데 왜 예까지 나왔소? 누가 당신을 납치하기라도 하면 어쩔려구?"
  "그럴 염려는 없어요,아사달."
  "그걸 어떻게 장담하오?"
  "관음경을 읽어 보니까 그렇게 나와 있었어요. 관세음보살을 인념으로 부르는 사람은 도적들의 난도 피할 수 있고 어떠한 삼재팔난의 어려움 속에서도 구원이 된다고 했구요."
  아사녀는 염주를 들어 아사달에게 내보였다. 아사달은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어 아사녀를 꼭 껴안고 입맞춤을 했다.
  "아이,누가 보면 어떻게 해요."
  "보긴 누가 보겠소? 이 어두운데. 또,보면 어떠하오. 우리는 부부가 아니오."
  아사녀는 아사달의 넓은 가슴이 좋았다. 그의 굵직한 팔이 그리고 억센 힘이 좋았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밤새도록, 아니 평생토록 그 자리에서 안겨 있고 싶었다. 차라리 돌이 되고 싶었다. 
  "집에서 기다리기가 너무 지루해요. 당신이 일터로 나가고 나면 그 순간부터 오직 당신을 기다리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당신은 모르실지도 몰라요. 세상의 모든 아내가 다 그렇겠지만 제가 아사달 당신을 기다리면서 하루를 넘기는 것이 얼마나 간절하고 소중한지를."
  둘은 팔짱을 끼고 걸었다. 그러다가 한쪽 팔로 허리를 두르고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이토록 신날 수 있으랴. 아사달도 아사녀가 동구 밖까지 마중을 나오는 게 여간 반갑지 않았다. 그는 부처님에게 감사했다. 이토록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준 데 대한 고마움이었다.
  "난 역시 복이 많은 놈이야. 아사녀를 아내로 맞이하다니, 하여간 장가 하나는 잘 간 거야."
  아사달은 멈춰 서서 다시 한번 으스러져라 아사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아사녀는 아사달의 그런 갑작스런 행동이 전혀 싫지가 않았다.
  "아사녀! 일이 곧 끝나고 나면 당신과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 있게 되오."
  그러나 아사달은 또 떠났다. 이번에는 신라의 수도 서라벌이었다. 아사달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사녀는 자신의 생애가 끝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아사달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손에 남아 있는 것은 백팔염주뿐이었다.
  "아사달!"
  "아사다알"
  "아사다아아아알!"
  그녀의 애절한 외침은 어두운 숲속으로 퍼져나갔다. 메아리는 없었다. 아사녀는 자신의 외침이 되돌아오지 않는 데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는 울리지 않는 메아리를 찾아 나섰다. 숲속을 헤치고 냇물을 건너고 바위를 기어 올랐다. 어디에도 메아리는 없었다.
  그녀는 아사달을 부르며 정신없이 뛰었다. 돌다리를 건너니 파수 보는 병사가 창을 누이며 가로막았다.
  "어디를 가시오?"
  "지아비를 찾아 백제 땅 공주에서 온 아사녀라고 하옵니다. 제 남편 아사달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병사는 완강했다.
  "안 됩니다. 절이 완공되기 전에는 아무도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이는 지엄하신 어명이기 때문이오, 여자는 더더욱 안 됩니다."
  불국사 담을 끼고 돌며 아사달을 찾던 아사녀는 약간 허술한 곳을 발견했다. 그녀는 담을 넘었다.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주위를 살피며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아사녀는 석공들의 방이 즐비한 가건물로 발자국소리를 죽여 가며 걸음을 옮겼다.
  불 켜진 방이 딱 하나 있었다. 아사녀는 발을 돋우고 창틈으로 안을 들여다 보았다. 순간 그녀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꿈에도 그리던 지아비 아사달이 거기 있었다. 아사달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가부좌를 맺은 것으로 보아 명상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방 한쪽 구석에는 아사녀의 초상화가 세워져 있었다. 백제땅을 떠날 때 유명한 화공에게 부탁하여 그린 것이었다. 초상화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사녀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손등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초상화를 보았다. 거기에 눈물은 없었다.
  인기척을 느낀 아사달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쩜 저렇게 멋있는 남자가 있을까. 아사달은 누가 뭐래도 참 멋진 남자야 어머나! 저 거동 좀 봐. 꼭 황소가 움직이는 것 같애.'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문이 열리고 아사달이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아사녀!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난 정말 당신이 보고파 미칠 지경이었소. 아무튼 잘 왔소."
  "아사달! 얼마나 찾아 해맸는지 몰라요. 당신을 찾아 오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아세요? 흐흑, 미워요!"
  아사녀는 아사달의 품에 안기면서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콩닥콩닥 때렸다.
  "우리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나라에 매여 있는 몸이니 어쩌겠소? 우선은 잊읍시다."
  둘은 오랜만에 뜨거운 포옹을 했다. 기쁨과 슬픔이 그들 사이를 끝없이 왕래했다. 아사녀는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간은 두 사람을 위해 멈추지 않았다. 새벽이 열리고 있었다.

 


  범종이 울었다. 새벽의 어둠을 찢고 밝음을 향해 멀리멀리 사라져 갔다. 종을 떠난 소리는 다시는 종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따르르르륵, 목탁이 울었다. 새벽을 깨우는 소리였다. 밤새 질탕하게 판을 벌이고 놀던 어둠들이 스멀스멀 기어 달아나고 있었다.
  아사달의 얼굴에 불안이 얼핏 감돌았다. 아사달은 한숨을 쉬었다. 왕명만 아니라면 그대로 아사녀와 함께 돌아가고 싶었다. 백제 땅이든 신라 땅이든 아니면 중국이나 일본이라도 좋았다.
 둘이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아사달! 뭔가 안색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무슨 일이에요?"
  "아사녀, 나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소. 그러나 며칠은 더 기다려야 하오. 곧 석가탑이 완성될거요. 나는 일하러 나가야 하오. 무엇보다 당신을 만난 것이 발각되면 당신도 나도 끝장이오. 그러니 사람들이 다 일어나기 전에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구려. 
  아사녀는 아사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부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아사달이 그녀를 떼어 내며 말했다.
  "아사녀, 나를 기다리기가 지루하고 견딜 수 없거든 절 앞에 있는 영지를 들여다 보시오. 불국사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비친다고 해서 영지라고 한다오. 내가 쌓아 올리는 석가탑도 보일 것이오."
  아사달의 모습은 점점 멀어져 갔다. 아무리 그녀가 잡으려 쫓아가도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안타까운 마음에 아사녀는 안간힘을 다해 아사달을 불렀다.
  "아사다아아알..."

 


  꿈이었다. 이제까지 그녀는 염불삼매에 들어 관세음보살을 부르던 것이 아사달을 불러왔던 것이다. 그녀의 몸은 땀에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이미 아침이었다. 연못은 그하얀 비늘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연못가로 다가갔다.
  한 걸음 다가가 연못을 들여다 보았다. 다시 한 걸음 다가가 연못을 살펴보았다. 거기 불국사가 비치고 있었다.
  다보탑도 보였고 아사달이 쌓아 올린다는 석가탑도 일부 기단이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사달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 걸음 더 다가가 연못 둑에 섰다. 일렁거리는 수면 위로 그녀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그 얼굴은 금세 아사달의 얼굴로 변했다가 다시 아사녀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사달의 환한 얼굴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아사녀도 두 팔을 벌리며 아사달을 불렀다. 그의 넓은 가슴과 억센 팔에 안기고 싶었다. 아사녀는 아사달의 품을 향해 달려들었다.
  "풍덩."
  "아사다아아아알알알알!".

 


  그녀의 외침이 한 번 수면 위로 올라오고는 다시는 없었다. 연못은 다시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사람들이 달려왔을 때는 다만 흰구름과 불국사가 비칠 뿐이었다. 아사녀의 그리움과 슬픔과 애절한 외침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석가탑은 완성 되었다. 바로 그 시각에.
  아사녀의 죽음을 안 아사달도 연못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아사녀를 부르는 긴 외침이 불국사 경내 구석구석에 메아리쳤다. 
  그 후 석가탑은 영지에 서서 귀를 기울이면 천2백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절한 외침이 들린다고 하는데, 단 사랑하는 부부가 함께 들을 때만 들린다고 한다.
 

불국사 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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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 멧돼지로 현신한 지장보살 


  우리나라 제일의 생지장도량으로는 보통 철원의 심원사를 꼽는다. 생지장이란 '살아계신 지장보살'이란 뜻이다. 심원사 법당에 들어서면 크기가 한 자 남짓한 지장보 살상을 뵈올 수 있다. 이 지장보살을 뵙고 있노라면 옛날 교복 자율화가 되기 이전의 단발머리 여고생이 연상된다. 꼭 단발머리를 빗어내린 듯한 모습의 지장보살은 수더분하 기가 시골의 소녀를 빼다박은 듯해서, 거기에서 그 어떤 숭고미나 경건미는 찾기가 어렵다. 그만큼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는 분이 바로 생지장보살이다. 심원사는 신라 진덕여왕 I년(647)에 그 유명한 영원조사가 창건한 절인데, 한때는 수행하는 대중들이 천 명을 넘을 때도 있어서 중세에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보개산 줄기 남쪽으로는 심원사가 있고 북쪽으로는 석대암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다. 현재는 민통선 안쪽이기에 쉽게 가볼 수 없는 곳인데, 석대암 뒤쪽으로 난 봉우리를 환희봉이라 부르고 있다. 이 환희봉을 대소라치라 하기도 하는데 그 대소라치 너머에는 수백 호의 화전민이 살고 있었다. 이곳은 워낙 산세가 험준한데다 땅이 척박하여 농사를 짓는 것만으로는 생계를 꾸려 가기가 어려웠다. 기껏해야 조, 옥수수, 콩, 기장 따위가 고작이었고 그나마 일조량이 모자랄 경우에는 냉해로 흉년이 들곤 했다. 그렇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레 사냥을 곁들이게 되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사를 지었고 겨울 한 철은 사냥을 주업으로 삼았다. 특히 눈이 내리는 날이면 노루나 멧돼지 몰이 가 적격이었고 토끼나 족제비도 그런대로 수입이 짭짤했다. 사냥꾼들은 나름대로 수렵대라고 하는 조직을 형성하고 있었다. 수렵대 대장은 이순석이란 사람이었는데 그는 다섯 자밖에 안 되는 작달막한 키였지만 담이 세기로 소문이 났다. 물론 힘도 장사였고 또 날렵했다. 하루는 이순석이 친구 한 명을 대동하고 사냥을 나갔다. 창을 들고 활통을 어깨에 메었다. 둘은 대소라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숲은 우거져 한낮인데도 침침했고 겨울이라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눈은 아직 내리지 않았다. 이 골짝 저 골짝을 찾아 헤맸지만 다람쥐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즈음 들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개미 새끼 한 마리 구경할 수 없는 날은 아직까지 없었다. "여보게, 대장. 오늘은 아무래도 허탕인 것 같네. 참 이상하군. 이렇게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적은 없었는데." "친구, 둘이 있을 때는 대장이라 부르지 말고 그냥 이름을 불러 주게. 쑥스럽구먼. 그리고 사냥이란 게 꼭 잡히기를 바랄 순 없지. 어쩌다 운이 좋으면 큰 것이 걸려들지 누가 아는가?"  "그야 자네 말도 일리가 있기는 하네. 하지만 요즈음 우린 먹을 양식마저 떨어졌다네." "아니, 가을에 수확을 했을 게 아닌가. 이제 초겨울인데 벌써 양식이 떨어지면 보릿고개를 어찌할 셈인가" "쉿!" 친구가 손가락을 입에 대며 짧은 파열음을 냈다. 순석이 얼굴을 돌렸다. "저기, 저기 좀 보게. 저게 뭘까? 호랑이 같기도 하구 아니야 곰? 아니 아니, 저것은 돼지가 분명해." 친구가 소리를 낮추며 말하는 사이 순석의 손에는 이미 화살을 메긴 활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순석은 손에 땀을 쥐며 시위를 놓았다. "표-!" 화살은 돼지의 왼쪽 어깻죽지에 정확하게 꽂혔다. 비틀거리며 달아나는 돼지는 노오란 털을 지니고 있었다. 아름다운 황금빛멧돼지였다. 숲 사이로 언뜻언뜻 내리꽃히는 햇살을 받을 때는 더욱 아름다웠다. 두 사람은 핏자국을 따라 능선과 골짜기를 벌써 몇 개나 넘었다. 계곡에 이르렀을 때 돼지의 흔적은 더 이상 없었다. 그들은 목이 말랐다. 마침 그들이 앉아 있던 옆에 조그마한 웅덩이가 있었다. 타는 갈증을 적시기 위해 그들은 엎드려 한 참 동안 정신없이 마셔 댔다. 순석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어어!" 친구가 순석을 바라보았다. "여기 물 속에 뭐가 있어. 물이 출렁이지 않게 잠시만 기다려 봐." 잠시 후 동그라미를 그리며 번져 가던 파장이 멈추고 물은 거울처럼 깨끗했다. 거기에 순석이 방금 전에 쏘았던 화살이 꽂혀 있었다. 순석은 화살을 잡아당겼다. 화살 끝에 돌 하나가 묻어 나왔다. 단발머리를 빗어 내린 것 같은 조그만 석상이었 다. 손에는 조그마한 돌멩이가 쥐어져 있었다. 순석은 그 석상이 지장보살임을 간파했다. 언젠가 어떤 스님으로부터 들은 지장보살을 생각해 냈다. 


  손바닥 위의 밝은 구슬은 너무나 영롱하여 얼음인 듯 비치는 대상에 따라 색깔을 바꿈이 자유롭네. 몇 번이나 분부했던가 오욕의 어둠을 뚫고 나오라고 하지만 그 속에 갇힌 중생 밝은 구슬을 보려 하지 않네. "여보게, 이분은 지장보살님일세. 저 왼손에 들고 계시는 작은 구슬을 보게나. 지장보살은 명주를 들고 계시거든." 


  "그래? 우리 건져 올려 보세."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지장보살 석상을 들어 올렸으나 수면까지는 쉽게 떠오르는데 더 이상은 무게 때문에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석상은 크기로 보아 그 석상의 두세 배라도 장정 혼자 충분히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순석은 화살이 꽂힌 석상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합장을 했다. "지장보살님! 저희가 어리석어 성상을 몰라뵙고 활을 쏘았습니다. 얼마나 어깨가 아프시겠습니까? 하오나 저희들의 어려운 생활 형편도 참작해 주옵소서. 저회들은 농사를 짓는 것만으로는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없어서 사냥을 하게 되었고 고귀한 생명을 수없이 빼앗았나이다. 보살님께서는 저회들의 잘못을 용서하옵소서. 만일 저희들을 용서하신다면 내일 다시 찾아 뵙겠으니 그 증거로 샘가에 나와 앉아 계시옵소서. 그렇게 되면 저희들도 당장에 출가하여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지성을 다해 수도를 하겠나이다."

 

 그들은 그처럼 기도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순석은 수렵대 3백여 명을 이끌고 지장보살이 잠겨 있는 샘으로 올라갔다. 과연 지장보살 석상은 웅덩이 가에 나와 앉아 계셨다. 이를 본 순석과 그의 친구는 그 자리에서 미리 준비해 간 배코칼로 삭발을 했다. 그리고 수렵대 3백여 명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 자리에는 절이 세워졌다. 절 이름을 석대암이라 했다. 석대암에 모셔진 지장보살 석상은 2백여 년 동안 중생들의 귀의 처가 되었다. 그러다가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민통선이 이어져 신도들이 참배할 수 없게 되자 석대암에 모셔져 있던 지장보살 석상은 보개산 남쪽 기슭웨 자리한 심원사로 이사를 하신 것이다.

 

 지금도 심원사 지장보살상에는 그때 이순석의 화살을 맞은 자국이 왼쪽 어깨에 선명히 나 있다. 이는 지장보살이 살생을 업으로 하고 살아가는 대소라치 사람들에게서 산짐승을 보호하려는 자비심에서 현신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수렵이나 어업, 또는 정육점, 도살업을 주로 하는 신도들이 심원사를 찾아 지장보살께 참회기도를 올리고 나면 사업이 더욱 번성한다고 하여 연일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한 번은 지장보살을 모신 석대암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법당을 맡은 부전스님이 옥등잔에 불을 켜다가 잘못하여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옥등잔은 절반으로 쫙 갈라지고 못 쓰게 되었다. 부전스님은 송구하기 그지 없었다. 값을 떠나서 성보를 깨뜨렸다는 자책감에 몸둘 바를 몰라했다. 그는 다시 다른 등잔을 구하러 요사채로 내려오는데 갑자기 등뒤 법당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여보게, 부전. 내가 옥등잔을 붙여 놓았으니 걱정하지 말고 와서 불을 붙여라." 부전은 얼른 되돌아 법당으로 달려갔다.

 

  불을 켜보니 옥등잔은 깨어진 금이 남아 있을 뿐 좀전처럼 불을 밝힐 수 있었다. 기름도 새지 않았다. 부전은 지장보살 석상 앞에서 무수히 절을 했다. 이 지장보살 석상은 청록색이다. 나중에 여러 번 개금불사를 했지만 며칠 안 가서 저절로 벗겨지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금은 아예 개금을 하지 않은 순수한 돌 색깔 그대로 모셔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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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스님 삼국유사


어머니를 잃고 나자, 일연은 다시 개경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이제는 오로지 역사책을 쓰는 일에 마지막 생애를 바치기로 하였다.
일연은 나라에서 받은 땅에 '인각사'라는 절을 지었다. 그리고 그 절에 혼구와 죽허를 비롯한 여러 
학승들을 모이게 하였다.
일연은 이 절에서 역사책을 완성하고, 다른 학승들도 학문을 닦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인각사에 자리를 잡은 일연은 두 제자를 데리고 단군왕검의 이야기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 이전의 
이야기도 쓰고 싶었지만 이미 자료가 많이 묻히고 없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단군왕검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단군왕검은 중국 황제의 아들이 아니었다. 원래 우리 한민족의 시조로 중국과 맞서는 고조선이 
있었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확실히 쓰고 싶었다. 

일연이 여기저기에서 모은 자료에 따르면 오히려 고조선의 세력이 중국보다 더 컸다.
일연은 눈이 침침하면 눈을 찬물로 씻어가며 책을 써 내려갔다. 간혹 꿈 속에 단군왕검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 원효대사가 보이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광개토대왕이 흰 말을 타고 나타나 멀리 
중국땅을 가리키며 저것이 우리 땅이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였다.
글을 쓰면서 일연은 지그시 눈을 감고 마치 옛날 자신의 이야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자들의 눈에는 그런 스승의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혼구와 죽허는 스승의 그런 모습을 닮고 싶었다.
일연은 손을 조금씩 떨면서 흰 종이 위에 가는 붓으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 그러면 혼구는 스승이 
써준 글을 새 종이에 옮겼다.
죽허는 마치 팔만대장경을 새길 때처럼 정성을 들여 그것을 목판에 새겼다. 작은 글씨가 촘촘하게 차 있는 
종이를 모아 책으로 엮어나갔다.
책을 만드는 동안 혼구는 일연에게 질문을 많이 하였다.
"스승님, 우리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배워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책에는 단지 전해오는 이야기만 기록한 것도 있는데 이것도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 아무리 황당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묻어 있으며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
일연과 혼구는 책을 쓰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죽허 또한 그 이야기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어떤 날은 책을 만들다 말고 밤새도록 이야기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연 못지 않게 혼구도 이미 상당한 학식이 있었다.

일연이 정신이 가물거려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혼구가 대신 쓸 정도였다.
특히 혼구는 고구려, 신라, 백제에 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시조인 단군조선에 관하여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이 부분의 내용을 쓸 때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연은 어느덧 네 권의 책을 쓰고, 다섯 권째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미 완성한 네 권의 책 내용은 이러하였다.
제 1권과 2권은 '기이' 편으로 나라를 세운 왕들에 관한 이야기를 실었다. 1권에는 고조선과 동방의 작은 나라와 삼국통일 전까지 신라의 역대 왕에 관한 이야기를 적었다. 마한, 낙랑, 부여 등의 나라가 세워진 이야기라든지,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제 3권은 '흥법'과 '탑상'편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흥법'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각 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과정을 설명하였다.
'이차돈의 순교' 이야기도 여기에 넣었다.
'탑상' 편에는 각 절의 불탑이나 종, 불상 등에 얽힌 이야기를 적었다.
황룡사의 구층목탑이나 문수사 석탑에 얽힌 이야기 같은 내용이 여기에 들어갔다.
제 4권은 '의해' 편을 실었다. 여기에는 원광법사, 원효대사, 의상대사 등 신라의 이름난 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써 놓았다.
이제 일연은 제 5권을 쓸 차례였다.
"스승님, 이제 마지막 권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쓰실 건지요?"
혼구가 일연에게 물었다.
"우선 네 부분으로 나눌 것이다. '신주' 라하여 신통한 이야기를 적을 것이고, '감통' 편에는 도술을 부려 하늘의 해를 없애버리거나 왜적을 물리친 이야기를 실을 것이다. 또한 '피은' 편을 두어 속세를 떠나 숨어 살면서 노래와 시를 지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기록할 참이다."
일연의 설명에 혼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옆에서 듣고만 있던 죽허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 부모님께 효도를 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습니까?"
"허허, 그렇구나. 암, 써야지. 그런데 죽허가 어떻게 그 생각을 하였을고?"
일연은 죽허를 놀리듯 말하였다. 죽허는 평소에 너무 말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스승님께서 고향에 내려가 어머님을 모신 일이 생각났습니다."
죽허는 얼굴을 붉히며 말하였다.
"부끄럽구나... 그러고 보니 죽허가 아버지를 보살피던 일도 생각이 나는구나, 허허. 그러면 효선편을 넣어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을 넣도록 하자."
일연과 죽허는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옆에 있던 혼구도 따라서 큰 소리로 웃었다.
"허허허..."
"껄껄껄..."
방 안에서는 한동안 웃음소리가 시원스럽게 울려퍼졌다.
일연과 두 제자에게는 역사책을 쓰는 일이 큰 기쁨이었다. 이 책을 쓰기 위해서 일연은 아홉 살에 집을 떠나 70년 가까운 세월을 힘들게 견뎌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열매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연은 붓을 놓고 두 제자를 불렀다.
온힘을 쏟은 끝에 드디어 다섯 권의 책이 마무리 되었던 것이었다. 일연은 책의 이름을 '삼국유사'라고 지었다.
삼국유사라 씌어진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일연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줄 흘러내렸다. 자신의 
한평생을 담은 책이었던 것이다.
일생 동안 보았던 고려의 많은 것들, 많은 이야기들...
일연은 그 책을 가슴에 한번 대어보았다. 향긋한 먹내음이 났다.
일연은 이 책이 고려의 혼을 지키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부처님에게 빌었다.
일연은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두 제자를 불렀다.
"자,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역사이다. 물론 역사를 다 다루지 못하고 빠진 부분도 많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몽골족의 침략으로 잃어버린 우리 민족의 영광을 다시 찾아줄 것으로 믿는다. 이 책은 몽골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죽어간 수많은 백성들의 영전에 고이 바친다. 그들의 값진 죽음이 바로 이 책을 만든 힘인 것이다. 또한 우리 시대의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이 잘 기록해줄 것이다."
일연은 어느덧 두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두 제자는 스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늙은 스승은 수염은 물론 눈썹까지 하얗게 세어 있었다. 그 동안의 세월을 말해 주는 듯 하였다.
두 제자는 그런 스승의 모습을 쓸쓸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일연이 큰 소리로 말하며 웃었다.
"이놈들아, 너희들 머리털도 벌써 허옇게 세었구나, 껄껄껄."
"허허허..."
두 제자도 따라 웃으며 서로 자기 머리를 만졌다. 
머리털이 잡힐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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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하는 여인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김재량을 사랑하는 여인들  자장율사 

 김재량을 사랑하는 여인들과  자장율사


  '투기하는 여인은 유치하고 꼴불견이다. 그러나 투기하는 여인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여인에게서 투기를 빼 버린다면 빈 껍데기만 남을 것이다.'
  김재량은 이런 생각을 하며 며칠 전에 만난 세 낭자를 떠올렸다. 청년 장수 김재량은 뛰어난 풍모로 인해 많은 처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더욱이 신라와 백제의 전투에서 김재량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돌아왔으니, 신라의 수도 서라벌 귀족들은 그를 사윗감으로 내심 점찍고 있던 터였다.
  "참, 아름다운 여인들이야. 그것도 한 사람도 아니고 셋이 한꺼번에 나를 좋아하고 있으니, 흐흐흐."
  그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면서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이게 내게 있어서는 여난이 아닐까. 아무려면 어때, 여난이든 여복이든 나는 즐겁기 짝이 없는데.'
  침대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니 쏟아질 듯 걸려 있는 들보가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며칠 전 승전 축하연에서 그는 세 여인의 구혼을 받았다.
  '참 재미있는 세상이야. 여인들이 대담하기도 하지, 내게 구혼을 해 오다니. 하지만 자유연애가 허락되는 요즘 세상에 그리 대수로울 것도 없지.'
  김재량은 참으로 즐거웠다. 남녀가 자유롭게 만나도 허물이 되지 않는 신라의 정치제도가 마음에 들었다. 만일 여인들이 규방에 틀어박혀 바깥 나들이도 제대로 못했다면 얼마나 슬픈일 일까. 그것은 고구려나 백제도 마찬가지였지만 불교의 자유사상을 바탕으로 남녀를 동등하게 대우해 주는 신라의 제도가 꽤 마음에 들었다.

김재량을 사랑하는 여인들

김재량을 사랑하는 여인들

 


  "불교의 사상은 평등사상이야. 겉으로는 남성 우위인 것 같지만, 불교의 핵심은 남녀의 평등한 권리를 설파하고 있는 거라구. 우리 신라인들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불교가 국교로 공식 인정된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거야."
  그는 언젠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자기가 했던 말을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다.
  세 여인은 서라벌 진골 출신의 딸들이었다. 이들은 집안의 어른끼리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으며 자주 왕래도 하고 의견도 함께 나누었다. 그녀들은 부모들로 인해 더욱 가까워졌고 또 절친하게 지냈다.
  "우리 시집갈 때는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가자."
  "어머, 그럴 수 있을까?"
  "왜, 안 되겠니. 어른들께 말씀드려 합동 혼례식을 거행하면 되지."
  "듣고 보니 가능하기도 하겠구나. 얘, 그러면 오늘, 우리 이 얘기를 반드시 실현시키기 위해 약속하자."
  "어머! 어떻게?"
  세 처녀들은 즐겁게 웃고 떠들다 헤어졌다. 셋은 늘 함께 몰려다녔다. 셋 중에 한 사람만 참석치 못하게 되어도 아예 약속을 취소하고 말 정도였다.
  이 세 처녀는 김재량 청년의 승전 축하연에도 함께 참석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세 처녀는 마음속에 각자 김재량을 자기의 낭군으로 맞고 싶어했다. 다른 모든 것은 세 처녀가 함께 할 수 있었지만, 남녀관계란 언제나 혼자만 소유하고픈 독점욕이 있는 것일까.


  서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김재량을 자기만의 남자로 만들려는 생각은 똑같았다. 세 처녀는 그날부터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늠름하면서 그 서글서글한 눈동자가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참 멋진 남자야. 내 낭군으로 맞이 해야지, 호호.'
  김재량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세 처녀를 번갈아 가며 만나기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세 처녀가 한꺼번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 여인들은 어떠한 핑계를 대서라도 나머지 둘을 서로 따돌렸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김재량을 만나는 날만은.
  꼬리가 길면 밟힌다지 않던가. 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퍼졌다. 더욱이 소문은 살이 붙고 덤이 곁들여져 한껏 부풀어 있었다. 나중에 그 소문이 부모들의 귀를 통하고 입을 통해 전달되었을 때 세 처녀의 질투심은 극에 달했다. 만나지 않을 뿐아니라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서로 외면했다.
  그러던 중 신라는 고구려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청년 장수 김재량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전쟁터로 나갔다. 고구려의 기상은 대단했다. 그러나 김재량도 만만치 않은 장수였다. 악전고투 끝에 승리를 거둔 신라의 장병들은 김재량을 외쳐 대며 자축연을 베풀었다.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며 그들은 들떠 있었고 기강은 해이해져 있었다. 개선하는 중이었다. 이때 난데없이 일군의 복병들이 튀어나와 방심한 김재량을 죽이고 말았다. 김재량은 그렇게 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삼도의 강을 건넌 것이다.

 


  김재량이 세상을 떠나자, 그 동안 그토록 서로 질투하고 적대시하던 세 처녀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화목한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각자 김재량을 너무나 극진히 사랑했기에 시집갈 것을 포기하고 모두 산으로 들어가 두타고행을 하여 마침내 여신이 되었다. 그 산이 바로 오늘날 강원도 동해시 부근의 두타산이다.   세 여신의 이름은 나림여신과 혈례여신, 골화여신이었다. 그들은 도를 얻었고 신통변화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녀들 마음속에는 아직도 미세한 번뇌가 남아 있었다. 이를테면 누진통을 얻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들은 김재량의 죽음을 서로의 잘못으로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그것이 기화가 되어 마음속에서 저주의 불꽃이 조금씩 넘실댔다.
  세 여신은 그곳 주민들이 산에 치성을 드려 자기네를 공경하기를 원했고, 만일 복종하지 않으면 노여움을 나타내 마을에 재앙을 내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대산에 성지를 개설하고 적멸보궁을 세운 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자장율사가 동해안으로 내려오던 중이었다.

자장율사 


  두타산의 산세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말을 들은 그는 우선 두타산에 들르기로 마음을 정하고 발길을 내딛었다.
  이때 자장율사를 본 나림여신은 그가 산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한편 자신의 도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여 자장율사를 유혹했다.
  "스님, 어디로 가시옵니까?"
  자장이 대답했다.
  "이 산의 산세가 하도 좋다기에 절을 창건할 인연지가 있나해서 왔소."
  여인이 짐짓 다소곳한 모습을 지으며 말했다.
  "참으로 장하고 거룩하십니다. 저도 따라가고 싶사오니 허락해 주옵소서."
  자장은 한마디로 잘라 거절했다.
  "산길이 험합니다. 매우 힘들 것이니 나중에 절이 창건되거든 그대나 오시지요."
  달빛이 흐르고 있었다. 선선한 초가을 날씨라 춥지도 덥지도 않아 산길을 걷기에는 그만이었다. 아직 단풍은 들지 않았지만 풀잎도 나뭇잎도 이순을 넘긴 인생처럼 황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장은 혼자 중얼거렸다.
  "꽃은 피어도 곧 지고 사람은 나도 이윽고 죽는다. 이 법칙은 생명 있는 것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나고 죽음이 다하고 피고 짐이 다한 곳에 고요의 즐거움이 있나니, 이것이야말로 가장 참다운 즐거움이니라. 그래, 참 좋은 말씀이야. 부처님의 말씀은 구구절절이 옳거든."   자장은 젊은 시절 어떤 스님으로부터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이란 열반사구를 듣고 환희심에 넘쳤던 일을 상기하며 그를 풀이해 본 것이었다.  얼마를 걸었는지 모른다. 해질녘에 두타산으로 들어왔고, 아무래도 지금은 삼경쯤은 족히 되었을 성싶었다.
  '참 괜찮은 산이로군.'
  그때 문득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뒤를 돌아본 자장은 내심 크게 놀랐다. 멀찌감치 나림여신, 바로 그 여인이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저 여인이. 이 험한 길을?'
  하지만 자장은 모르는 체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골화전에 이르러 자장은 외딴 주막집을 발견했다. 너무 이슥하면 안되겠다 싶어 주막에서 하룻밤 유숙키로 했다.
  어느새 여인이 따라 들어왔다. 한데 그녀는 손에 주안상을 들고 있었다. 자장이 말했다.
  "그게 무엇이오?"
  여인이 대답했다.
  "주안상이옵니다."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주안상을 무엇하러 가지고 들어오시느냐는 것이외다."
  "스님, 먼 길 오시느라 목도 마르실텐데 이 곡차로 목을 좀 추기심이 어떠할까 하여..."
  잠시 대답이 없던 자장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모습은 아주 진지했다.
  "여인이여, 당신은 지금 신력을 얻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신해서 나를 유혹하는가 본데...'
  여인이 말을 잘랐다.
  "변신이라니요? 제 본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다고들 하는데요. 그리고 유혹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내 보기에 여인은 많은 신력을 얻었는데, 이를 좋은 쪽으로 쓰시고 좀더 공부하여 열반락에 안주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자장의 법문을 듣고 나림은 깨달았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라니요. 참회하는 마음을 지닐 대 이미 죄업은 사라집니다. 나림은 참 착한 보살이십니다."
  "아니, 어떻게 제 이름을?"
  "내 잠시 선정에 들어가 보았소이다. 마음 한 번 돌이키면 거기가 바로 극락이요, 부처님의 세계입니다. 나림여신이여, 그만 일어나 편히 앉으시오."
  나림여신은 자장의 법설에 감동하였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모든 생각을 돌이켜 참된 불제자가 되길 맹세하고 자장에게 귀의했다.
  나림은 자기 처소로 돌아와 그 사실을 얘기하고 혈례와 골화에게도 함께 귀의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아직도 두 여신은 교만이 가시지 않았다. 비웃으면서 말했다.
  "그까짓 스님 하나 제대로 유혹 못 하고 오히려 매수를 당해? 도대체 우리 여신들의 자존심은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우리 둘이라도 힘을 합하여 그 자장인가 뭔가를 혼내 주자. 그리고 이곳에 절을 짓게 되면 마을 주민들이 자장에게만 귀의하고 우리에게는 공양도 올리지 않게 된다구. 그러니 절대로 절을 짓지 못하게 해야 돼."
  "그렇게 하자."
  혈례와 골화는 즉시 호랑이로 변하여 자장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앞길을 막은 채 으르렁댔다.
  자장이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어조로 꾸짖었다.
  "이런 무례한 짓이 있나, 아무리 축생이기로서니 스님의 길을 막다니, 어서 썩 길을 비키지 못하겠느냐."
  호랑이들이 달려들었다.
  "어흐응. 어흐응."
  자장은 호랑이들의 기세를 대하며 금강삼매에 들어 몸을 금강석과 같이 하였다. 호랑이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한 마리는 발톱으로 내리쳤고 한 마리는 옆구리를 물었다. 그러나 스님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호랑이의 발톱이 부러졌고 이빨이 빠져 버렸다. 호랑이들은 기겁하고 놀라 꼬리를 사리면서 도망쳤다.
  자장이 주문을 외웠다. 금강역사가 나타나 큰 칼을 들고 뒤를 쫓아 도망치는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아 왔다. 자장이 말했다.
  "자, 이제 너희들의 본색을 드러내거라."
  순식간에 호랑이들은 혈례와 골화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두 여신들은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참회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자장이 타일렀다.
  "잘못을 알았으면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마시오. 미움과 시기, 온갖 간악한 질투는 모두 욕망에서 비롯되니, 오늘부터 그대들은 욕망의 불을 끄는 공부를 하고, 이미 얻은 신통력은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데 쓰도록 하시오."
  그때 언제 왔는지 나림여신이 곁에 와 있었다.
  "스님의 원력으로 저희들은 개과천선하고 불심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앞장서서 금당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울러 스님을 도와 사찰 창건불사에 동참하겠습니다."
  나림여신이 안내한 장소에 자장율사는 가람을 세우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았고, 세 여신은 장사로 변하여 무거운 짐들을 운반하였다. 그 후에 이 절은 세 여신이 화합하고 발심하여 세운 것이라 하여 삼화사라 했고 마을의 이름도 삼화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이 절을 짓고 통일이 되었다고 해서 삼화사라 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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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가 펴진 수동이 이야기 서울 수유동 삼각산 삼성암 나반존자


서울 수유동에 위치한 삼각산 삼성암

지월스님(1911--1973)에게는 속가로 먼 친척뻘 되는 사람 중에 임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선달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보통 임 선달이라 불렀다. 이 임 선달에게는 수동 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척추를 앓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곱사등이가 되고 말았다. 그럼, 지월스님이란 어떤 분인가. 그는 10세기 한국 불교의 위대한 선지식으로서 천진도인이라 불렸던 고승이었다. 


  지월은 그의 호며 법명은 병안이었고 이름은 김봉만이었다. 1911년 2월 4일, 전북 남원군 동면 인월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김오역 씨였고, 그는 I916년 열여섯 살의 나이에 오대산 월정사에서 지암종욱을 은사로 출가 득도하였다. 그의 수도 생활은 철저하였다. 상원사 한암중원선사를 모시면서 정진하던 그는 1935년 범어사에서 일봉화상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그리고 금강산 마하연에서 만공월면선사에게 법을 묻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본디 생각이 없었지만 대중들의 간곡한 청을 물리칠 수 없어 잠시 해인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평생을 자비와 인욕으로 산 분이었다. 해인사 일주문 앞에 선사의 비가 세워져 있는데 1973년 3 월 27일 입적하였다고 한다.

 

 이 지월 큰스님이 광주에 볼일이 있어 잠시 들렀다가 친척 뻘 되는 임 선달의 집을 방문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큰스님. 어인 일로 저희 집을 다 찾아 주셨습니까?" "  공주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어떻게 사는가 보려고 잠시 들렀네. 그래 살기는 괜찮은가?" "예, 경제적으로야 그리 큰 어려움이 없는데, 얼마 전부터 제 아들 녀석이 척추병을 앓더니 마침내 곱사가 되고 말았지 뭐겠습니까?" "그럼 병원엘 데리고 가야지. 병원에서는 뭐라던가?" "의사들도 곱사는 고칠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는 수 없지요. 그것 다 제 팔자라면요." "허! 이 사람, 팔자 타령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세. 어디 내가 그 아이를 좀볼수 있을까?" "그럼요, 당연하지요."

 

 임 선달은 아들 수동이를 데리고 나왔다. 열댓 살 정도 얼굴은 수려하게 잘 생겼는데, 그만 안타깝게도 안팎으로 등과 가슴이 튀어나온 곱사가 되어 있었다. 지월스님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 수동이라고 합니다. 임수동." "나이는 몇 살이지?" "올해 열일곱 살입니다." "너 기도 한번 해보지 않겠니? 네가 마음만 굳게 먹으면 기도해서 너의 그 곱추병을 치료할 수도 있을 텐데." 수동이는 눈망울을 반짝이며 지월스님 앞으로 바싹 다가 앉았다. "병만 고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물론 아버지께서 허락하셔야 하겠지만." 수동이가 말을 마치며 아버지 임선달을 바라보자 임선달이 고개를 고덕였다. "네, 하겠습니다. 큰스님께서 가르쳐만 주시면 힘껏 기도를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월스님은 소년 수동이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 왔다.

 

 6, 25전쟁이 일어난 직후여서 가는 곳마다 전쟁이 스쳐 간 흔적들이 남아 있었고 폐허가 된 건물이나 불탄 자리들이 아직도 쓰라린 경험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지월스님은 미아리고개를 넘고 수유리로 들어섰다. 허허벌판에 가끔씩 보이는 집들이 마치 시골을 연상케 했다. 화계사에서 점심 공양을 한 스님은 수동이를 데리고 산에 올랐다. "스님, 산세가 정말 기가 막힙니다. 서을 주변에도 이처럼 아름다운 산천이 있었습니까? 이 산은 이름이 무엇인지요?" "좋으냐? 이 산은 북한산 줄기로처 도봉산과 함께 서울을 지켜 주는 삼각산이라고 한단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암자가 하나 있는데 삼성암이라고 한다." "삼성암이라면? 그것은 무슨 뜻이옵니까? 별이 셋이란 의미 인가요?" "그게 아니다. 삼성암의 삼성은 세 분의 깨달은 성자를 모셨다는 의미란다. 이 세 분의 성자는 보통 산신과 독성과 칠성을 모시기도 하구 칠성 대신에 용왕을 모치는 곳도 있단다.

 

 여기 삼성암은 독성님이 특히 영험이 있으시단다. 독성님은 나반존자라고도 하지." 수동은 나반존자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집에 있을 때, 어떤 스님이 와서 나반존자에게 기도를 하면 병이 나을 수 있다고 하던 말이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저, 큰스님. 나반존자란 어떤 분칩니까? 자세히 일러 주십시오." "허, 그 녀석. 기도도 시작하기 전에 벌써 불교 공부를 다해 버리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내 얘기해 주마." 지월스님은 그 조용조용한 음성으로 나반존자에 대해 설명을 했다. 다소곳이 듣고 있는 수동에게서도 진지함이 엿보였다. "나반존자의 (나반)이란 (나한)이라는 말이 와전된 것으로 보여지는구나. 독성이니 독수성이니 하기도 하는데 머리카락이 희고 눈쉽이 긴 모습을 하고 있는 성자란다. 부처님에게는 1,255명의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열여섯 명의 위대한 깨달음을 이룬 제자들이 있었단다. 그들을 16성이라고도 하고 16나한이라고도 하지. 나반존자는 그 가운데 한 분인데, 원 이름은 핀돌라브하라드바자(Pindolabharadva)라고 한단다. 한문으로 (부동이근)이라 번역하며 그 뜻은 남인도 마리산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온 세상 중생들을 이익되게 한다는 의미란다. 또는 그의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풍모는 늘 중생 들을 위해 쓰는 데 변함이 없고 끊임이 없다는 뜻도 있지. 어때? 알아듣겠느냐" 수동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상당히 어렵습니다. 하오나 이해하려 노력하고는 있습니다." "그래. 그럼 좀더 재미있게 얘기해 주마.

 

 이 나반존자는 원래 발차국 구사미성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큰 장사꾼이었지. 나반존자는 어려서 불교에 귀의하였고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는데 하도 열심히 정진을 하여 남보다 훨씬 빨리 도를 깨닫고 여러 곳으로 전법의 길을 떠나곤 했단다. 그러던 중 부처님께서 도를 깨달으신 지 6년째 되던 해에 이 나반존자가 왕사성에서 신통을 부렸다가 부처님께 꾸지람을 들었단다. 부처님은 (나의 제자는 신통을 부리는 것으로 능사를 삼아서는 안 된다. 오로지 바른 법으로 중생을 교화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셨거든. 그 뒤로 나반존자는 서구야니주에 가서 교화하도록 부처님의 특별한 지시를 받았지.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돌아오니, 부처님께서는 나반존자에게 열반에 들지 말고 미륵부처님이 이 땅에 오실 때까지 마리산에서 기다리라고 한 거야. 그래서 지금도 나반존자는 남인도 마리산에 머물고 계신단다. 


  게다가 나반존자는 중생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낫게 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우고 세상사람들의 위대한 복전이 된 거란다." 얘기를 하다 보니 벌써 삼성암이 솔밭 사이로 보였다. "독성님은 곧 나반존자님을 일컫는 말이고 독성기도를 할 때는 (나반존자)라는 이름을 열심히 부르는 거란다. 다 왔구나. 수동아 어서 손 씻고 기도 준비를 하거라." 지월스님이 목탁을 잡았고 수동은 뒤에서 열심히 절을 하며 오로지 나반존자만을 열심히 염불했다. 기도 기간은 우선 1백일을 잡았다. 정말 지극정성으로 기도했다. 때로는 침식조차도 잊고 기도에 전념했다. 공양 시간과 해우소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기도에 매진하 였다. 하루에 잠은 네 시간을 잤다. 백일기도에 전혀 잠을 자지 않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새벽 4시에 기도를 시작하면 자정이 되어서야 법당에서 내려왔다. 무엇보다 지월스님의 원력이 대단했다. 수동은 본인 자신의 병을 고치겠다는 것이었지만 지월스님은 수동의 곱추병을 낫게 하겠다는 보살의 마음이었다. 50일이 지나고 다시 70일을 넘겼다. 그리고 다시 1백일이 되었다. 회향하는 날 사시에 이르렀을 즈음 수동은 그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데다 어느 정도 긴장도 풀렸음에서 인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어떤 사미승이 나타났다. "수동 처사님, 저와 함께 어디를 좀 가십시다." "가다니, 어디를 말이오?" "가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오시오." 사미는 앞서 걸었다. 수동은 자신도 모르는 어떤 힘에 이끌려 사미를 따라갔다. 온갖 기이한 풀과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곳이었다. 주위의 깎아지른 절벽이 곧장 수동을 향해 덮칠 것 같았다. 사미는 절벽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수동도 사미를 따라 절벽을 기어올랐는데 전혀 힘들지 않았다. 절벽을 올라서니 커다란 샘이 있었고 그 샘 옆에 바가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사미는 자신이 먼저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마시고는 물을 떠서 수동에게 건네 주었다. 수동은 그 샘물을 마셨다. 물맛은 이 세상 어디서도 맛볼 수 없을 정도로 향긋하고 시원했다. 물을 마시고 나서 한참을 더 올라가니 큰 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아래 웬 노승이 앉아 있었다. 노승은 머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눈썹은 유난히 길었으며 승복을 입고 있었다. 수동은 자신도 모르게 노승에게 넙죽 큰절을 올렸다. 노승이 말했다. "거기 앉거라. 네가 수동이라 했느냐? 참으로 가엾구나." 수동은 노승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미가 노승 옆에 서 더니 귓속말로 노승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네가 나반존자 백일기도를 했구나." "네, 백일기도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장하구나 내 너에게 선물 하나를 주고 싶은데 거절하지 말고 받아라." 수동은 선물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노승은 그 긴 장삼 소매에서 무엇인가를 고집어냈다. 금침과 은침이었다. "이 침을 맞으면 네 곱추병이 낫게 될 것이다. 다 네가 열심히 기도한 덕으로 되는 것이니 고마워할 것까지는 없느니라." 노승은 말하면서 한 손으로 금침을 잡아 수동의 앞가슴을 찔렀다. 전혀 느낌이 없었다. 노승은 다시 은침을 잡아 등에 꽂 았다. 역시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침은 끝까지 다 들어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노승이 말했다. "앞으로 한 달 정도면 네 곱추병은 깨끗이 나을 것이다. 그 동안이라도 기도를 열심히 하도록 해라." 수동은 신기해서 노승에게 물었다. "정말 나을 수 있는 건가요?" "그래 꼭 나을 수 있다." 말을 마치고 노승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짚고 있던 주장 를 허공에 던졌다. 주장자는 갑자기 하얀 학으로 변했다. 노승은 그 학을 타고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는 노스님을 불렀다. "스님! 스님!" 지월스님은 기도를 하다가 수동이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 보았다. 수동이는 엎드려서 손을 허우적대고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하다 싶어 수동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이 녀석, 꿈을 꾼 게로구나." 수동은 지월스님이 흔들며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던 수동은 깜짝 놀랐다. 단 위에 모셔진 독성님을 어디선가 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 그분이었구나. 나반존자님이셨구나. 틀림없이 그분은 나반존자셨어요." 지월스님은 짐작했다. 기도 성취가 이루어졌음을 수동의 표정과 언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수동은 기도회향을 하고도 한 달 동안을 더 삼성암에 머물면서 나름대로 기도를 했다. 과연 수동의 몸은 놀랄 만큼 좋아졌다. 한 달이 지나니 이젠 완전히 나아 보통 사람과 똑같이 되었다. 지월스님과 수동의 기도를 처음부터 보아 온 삼성암 신도들은 공연히 헛고생한다며 비웃기도 했었다. 속병이나 두통, 또는 기타 다른 병이라면 모르되 곱사가 어떻게 기도로 나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한 조소를 일축하면서 그들은 열심히 기도에만 매진했었다. 수동의 곱추가 완전히 낫고서야 삼성암의 신도들은 물론 서울이나 수유리 사람들도 비로소 나반존자 독성기도가 얼마나 영험이 있는가를 알았다. 수동이 삼성암을 떠나는 날, 수많은 사람들이 수동의 쾌유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공주에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임 선달도 자리를 함께 했다. 순식간에 삼성암에는 수백 수천의 인파로 발들여놓을 틈이 없었다. 지월스님은 법문을 했다. "이곳 삼성암은 이제 창건된 지 불과 1백 년도 못 되는 짧은 역사를 갖고 있는 절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청도 운문사 사리암과 함께 중요한 나한도량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기도란 본디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엄격히 따진다면 도량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도량이 좋을 때는 기도 성취가 빠르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바로 환경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측간에서는 향내를 맡을 수 없고 법당에서는 구린내를 맡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법당에 있으면 향내를 맡지 않으려 해도 자연히 향내가 코로 스며들고 옷에 스며들어 가며 측간에 있으면 아무리 구린내를 맡지 않으려 해도 코에, 옷에 구린내가 배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관음도량에서는 관음기도가 잘 되고 지장도량에서는 지장기도가 잘 되듯이 독성도량에서는 독성기도가 빠른 것 입니다. 기도는 성취의 가능과 불가능이 기도하는 자에게 달려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도량에서 기도를 한다면 그 성취는 더욱 빨리,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지월스님은 본디 조용하고 말이 없는 분이지만 한번 사자후를 토해 내기 시작하면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만들고 나서야 끝을 내곤 했다. 한편 수동은 삼성암을 나와 고향 공주로 돌아왔다. 그는 그 후 결혼을 했고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 얘기는 '삼성암 독성기도 영험기'에 적혀 있다.

 

서울 수유동에 위치한 삼각산 삼성암

 

 수유리의 화계사에서 2km정도 올라기면 삼각산 중턱에 삼성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이 절은 화계사에 속한 암자로 조선 고종 9년(1872)에 고상진이 창건하고 처음에는 소난야라 하였다. 난야란 말은 아란야(Aranya)의 준말로서 적정처, 무쟁처, 원리처라 번역한다. 다시 말해서 고요한 곳, 시끄럽지 않은 곳, 한 적한 곳으로서 수행하기에 적당한 숲속이나 넓은 들, 또는 모래 사장 따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보통 촌락에서 1구로사나 반 구로사 정도 떨어진 곳이다. 구로사는 인도의 척도 가운데 하나로 소의 울음소리나 북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를 말한다. 1O년 뒤인 1882년 박선묵이 독성각을 짓고 독성님을 모신 뒤에 삼성암이라 하였다. 칠성각은 1936년에 동운이 지었으며 그 후 1942년 7월 심한 폭우와 산사태로 말미암아 쓰러진 것을 화계사 주지로 있던 회경이 중창하였다. 현재는 박세민 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퇴락하거나 협소한 당우를 보다 못해 크나큰 원력을 세워 새롭게 도량을 가푸어 놓았다. 또한 지금은 조계사의 직할 사암으로 소속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나한도량,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기도처는 유명한 곳이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청도 운문사 뒷산에 있는 사리암이요, 다른 하나는 바로 이곳 서울 수유동에 위치한 삼각산 삼성암이다. 삼성암 천태굴의 나반존자는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원래 이 절이 처음 창건되기 이전에 이 절의 창건주인 고상진을 비롯하여 박선묵, 유성종, 서윤구, 이원기, 장윤구, 유재호 등 일곱 명의 신도들은 천태굴에서 나반존자 독성기도를 삼일간 마치고 절을 창건하기로 약속을 하였다고 한다. 그때 기도가 끝난 후 일곱 사람들은 모두 가피를 얻어 지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처럼 창건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삼성암은 독성기도 도량으로 전해오면서 수많은 영험 기적들을 갈무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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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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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와 이성계 도읍지로 한양과 서울의 유래 이야기



  고려 말기와 조선초기의 불교학자로서 무학자초(1327--1405)가 있었다.그는 쓰러져 가는 고려보다는 새로운 기운으로 일어설 조선을 예견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고려에서 왕사로 봉했으나 사퇴하고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사로 삼기를 원하자 이를 수락했던 것이다.

  조선 태조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으며, 특히 태조 이성계의 해몽을 해 준 이로도 유명하다.

  이성계는 송도에 있는 도창관에서 등극을 했다. 그는 구시대의 정치마당이었던 송도보다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갈 도읍지를 찾고 싶었다. 그는 조정의 대신들과 천도할 것을 의논 한 후 곧바로 무학스님을 초빙하였다.

  "대사, 대사께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갈 새 도읍지를 한 번 물색해 주시오. 새 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하지 않겠소? 잘 부탁하오."


  무학대사는 사적으로 따지면 태조와 친구 사이였지만, 공적으로는 엄연히 군주와 신하 관계였다. 지엄한 어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전하."

  송도 대궐을 빠져 나온 무학대사는 예로부터 신령스런 산으로 알려진 계롱산을 목표로 출발했다. 그러나 막상 계룡산 일대를 돌아보니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도읍지로는 그다지 손색이 없었으나 우선은 시기가 도래하지 않았음을 알고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천안과 수원을 돌아보고 과천에 이른 무학대사는 내심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멀리는 청계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그 맞은편에는 관악산이 떡 버티고 있어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구가할 만한 도읍지라 생각했다. 그러나 과천에는 도읍지의 젖줄이라고 할 만한 강이 없었다.

  '아니야, 여긴 도읍지로서는 부적당해. 우선 큰강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중소도시로서는 나무랄데가 없구나.'

  그는 발길을 돌려 매봉산 쪽으로 틀었다. 야트막한 산을 넘으니 거기 봉은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날이 저물었으므로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무학대사는 이튿날 아침 일찍 절문을 나섰다.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뚝섬 나루에 오니 배가 한척 기다리고 있었다.

  한강을 건넌 무학대사는 넓게 펼쳐진 들을 바라보며 '여기야말로 새로운 도읍지로구나'하고 생각했다.

  흐뭇한 마음으로 좀더 지세를 살펴보고 있는데, 뜻밖에도 한 노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있었다. 그 노인이 소를 몰며 말했다. "허, 이놈의 소. 미련하기가 무학보다도 심하구나. 어찌하여 곧은 길을 가려 하지 않고 자꾸 돌아서만 가려 하느냐?"

  무학대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학이라고? 그럼 나를 두고 일컫는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저 노인이 나를 알턱이 없는데. 하여간 물어나 볼까?'

  무학대사는 노인이 있는 곳으로 잽싸게 발걸음을 옮겼다. 무학대사가 말했다.

  "실례합니다만, 노인장께서 방금 소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노인이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왜 그러슈?"

  그의 대답은 무뚝뚝했다. 무 토막 자른 것 같은 그의 반문을 받아 무학대사는 주저주저하면서 말했다.

  "저... 무학 어쩌고 하신 것 같은데 사실인지요?"

  노인이 또 무뚝뚝하게 답했다.

  "이놈의 소가 미련하기가 무학보다도 더하다고 했소. 왜 더 알고 싶소?" 

  "예, 그게 무슨뜻이온지?"

  노인이 말했다.

  "내가 요즘 듣기로는 무학이라는 작자가 새 도읍지를 찾아다닌다고 하던데 좋은 곳은 다 놓아두고 엉뚱한 데만 찾아다니니 이 어찌 미련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소."

  무학은 노인이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노인에게 공손히 합장하고 말했다.

  "소승이 바로 그 미련한 무학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이곳이 새 도읍지로 적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노인장께서 소승에게 한수 가르쳐 주십시오."

  노인이 그제서야 밭에서 나와 말했다.

  "스님이 무학이라고 했소?"

  "예, 그렇습니다. 소승이 무학입니다."

  "이거 초면에 실례가 많았소."

  "아닙니다. 원 천만의 말씀을. 하옵고, 노인장꼐서 천년대계를 위해 새로운 도읍지가 있으면 소승에게 일러 주십시오."

  노인은 채찍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서 10리를 더 가서 지형을 살펴보도록 하시오. 아마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자, 그럼, 난 이만 실례하겠소."

  무학대사가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노인에게 인사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노인도 소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참으로 알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한 무학대사는 노인이 가르쳐준 대로 서북쪽으로 10리를 걸었다.

  그렇게 해서 당도한 곳이 바로 경복궁 자리였다.

  무학대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주변의 경관도 경관이려니와 지세가 너무나 새롭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삼각산을 주봉으로 하여 남산이 안산으로 알맞게 자리했으며 인왕산이 한녘에서 기운을 북돋아 주고 있었다. 그는 너무 기뻤다.

  "으음! 과연 명당이로다"

  무학은 자신도 모르게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아주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가는 여운을 남기면서 되돌아왔다.

  무학의 발길은 가벼웠다. 그는 삼각산 인수봉에 올랐다. 거기는 한 노승이 5백나한에게 예배하는 형국을 띤 자리였다. '그래, 이 인수봉을 안으로 넣고 성을 쌓으면 불교도 오랫동안 민중들 속에서 제 구실을 다할 것이로다'



  무학은 그 다음 인왕산에 올랐다. 그 산에 올라 삼각산 자락을 내려다보니, 참으로 명당 중에 명당은 자신이 처음 당도했던 그곳이었다. 그는 남산으로 올랐다. 북쪽으로는 아늑한 지세가 자리하고 있었고 남쪽으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데, 한강이남으로 넓은 들판이 한눈에 보아도 도읍지의 백성들을 먹여 살리고도 남을 듯 싶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자신이 지나온 청게산이 아련히 보였고, 과천 쪽으로는 관악산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관악산을 보면서 일말의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관악산은 화산으로서 그 산을 잘 달래지 않으면 아무리 남산이 중간에서 기후 조절을 잘 해 준다 하더라도 궁궐에 불이 자주 일어날 형국이었다. 그러나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리 예방을 하면 괜찮을 듯했다. 무학은 한양을 도읍지로 선택한 데 대한 무한한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송도로 향했다. '어서 가서 태조에게 이 소식을 알려 드려야 한다.'

  그의 걸음은 유달리 가벼웠고 또 빨랐다. 어느새 서대문자리를 지나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그는 잠시 지나온 곳을 되돌아 볼 겸 고개에 바랑을 벗어 놓고 쉬다가 또 하나의 명당을 발견했다. '여기다 절을 지으면 불교가 오랫동안 지속되리라.' 이 재가 무학대사가 사찰 명당자리로 잡았던 곳이라 하여 무학재로 불리다가 무악재로 변형된 곳이다.

  송도에 도착한 무학대사는 태조에게 그 동안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을 상세히 보고했다. 태조도 크게 기뻐하여 천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궁궐을 짓고 도성을 쌓으면서 새로운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도성을 어디에다 쌓느냐는 것이었다. 무학대사는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했고 조정의 개국공신들은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했다.

  수에 밀린 무학대사는 홀로 탄식하기를 마지 않았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무학대사가 불교인이었고 또 인수봉밖으로 쌓아야 천년대계를 이어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인수봉 안으로 도성을 쌓을 경우 불교의 억압이 심해지고 천년 도읍지가 5백년 밖에 갈수 없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개국공신들은 모두가 유생들이었다. 그들은 내심으로는 한양의 지기가 천년에서 5백 년으로 줄어드는게 아쉬웠지만 유교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교와 유교의 세 다툼을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유생들이나 무학대사나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논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마침내는 무학대사가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수적으로 미약해서가 아니라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즉, 입장이 난처해진 태조는 천제를 지내어 결정키로 했다.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낸 다음날이었다. 이른 봄이라 밤새 눈이 내렸건만 모두 다 녹아 버리고 축성의 시비가 되가 있는 인수봉 부근에만 선을 그어 놓은 듯 눈이 녹지 않았다. 선은 분명히 인수봉 안으로 나 있었다.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은 그것을 빌미로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것이 통과되었던 것이다.

  무학은 너무나 서럽고 울적하여 홀로 앉아 엉엉 울었다. 불교의 혜명이 끊긴다는 데 대한 불제자로서의 서러운 감정은 감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 후로 무학대사가 서러워 울었다하여 한양을 '서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한가지 설은 성을 쌓을 당시 눈이 선을 긋듯 인수봉을 둘러쌌다는 데서 눈'설'자와 울타리의'울'자를 따서 '설울'이라 부르다 나중에 '서울'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무학은 자신이 도읍지를 정한 데 대한 뿌듯한 자부심 못지않게 불교의 명맥을 단절시키게 했다는 자책감으로 너무나 서럽고 서러워 오랜 세월을 울먹이며 지냈다고 하는데는 이의가 없다.

  그리고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10리를 더 가라고 가르쳐 준곳을 왕십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일선에는 그 노인이 풍수지리에 능했다고 하는 도선국사의 후신이라고 하여 왕십리 일부 지역이 도선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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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부처님께 기도와 소원성취 그리고 보시



  조선 제 14대 선조(1567--1608)때이다.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학계리 광암 마을에 정씨라는 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마음씨도 착하고 일도 잘했으나 아이가 없었다. 집안도 그리 넉넉하진 못했으나 그래도 아이 없는 적적함에는 비길 수 없었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전혀 아무런 소식이 없자 정씨 내외는 명산대찰을 찾아 부처님께 기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정씨는 꿈을 꾸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소에 쟁기를 메워 밭을 갈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보습에 뭔가 이상한 물체가 걸려 나왔다. 돌미륵이었다.

  정씨는 몰던 소를 한 녘에 세워 놓고 돌미륵을 밭 가장자리로 모시고 나왔다. 그는 풀잎을 베어 깔고 그 위에 미륵 부처님을 안치하고는 열심히 절을 했다.

  "미륵부처님. 저의 소원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저는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오직 제가 바라는 것은 저희 내외에게 아들 하나만 점지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미륵부처님, 부처님은 온갖 것에 능치 못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저의 소원을 들어주옵소서."

  그때 미륵부처님의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희가 그토록 아들 얻기를 원하는데 어찌 무심할 수 있겠느냐. 우선 나를 먼저 구해 주길 바란다."

  "부처님께서 어떤 일이 있으시기에 미천한 중생에게 구해 달라 하십니까?"

  그때였다. 부처님의 이마에서 한 줄기 광명이 찬란하게 빛나며 하늘을 향해 뻗쳤다. 거기에 오색찬란한 구름들이 형성되면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정씨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앗! 이 찬란한 광명이!"

  그 소리에 놀라 문득 깨어 보니 꿈이었다. 정씨는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하려 하다가 아내가 짐을 꾸리는 것을 보고 물었다.

   "짐은 뭐하러 싸는 거요?"

  아내가 답했다.

  "잊으셨어요? 우리가 명산대찰에 기도하기로 했잖아요. 어서 가십시다."

  아내를 따라 여러 곳을 다니며 기도가 잘된다는 도량에서 정착을 했다. 그들 내외는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옛날 환웅은 신단수 아래 내려와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 그런데 그 웅녀란 여인은 본디 곰이었다. 그녀는 곰으로 있을 때 사람되기를 원하여 호랑이와 같이 백일기도에 들어가 삼칠일 동안 마늘 한 쪽과 쑥 한 줌을 먹으면서 기도한 끝에 웅녀로 변했다. 호랑이는 그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사람으로 환생하지 못했다. 삼칠일 만에 곰이 사람으로도 변했는데 백일기도만 하면 우리의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정씨는 그렇게 생각하고 아내와 함께 열심히 기도했다. 백일기도가 끝나 갈 무렵 피곤하여 잠시 졸고 있는데 정씨의 부인 꿈에 미륵부처님이 나타나 말했다.

  "그대의 남편에게 나를 구해 주면 소원을 이루어 주리라 했는데, 그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다. 이제 그대에게 거듭 말하노니 잊지 말라. 나를 구해 주면 너희 소원을 꼭 이루어 주리라."

  "예?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요?"

  그 소리에 옆에서 기도하던 정씨가 부인을 흔들며 말했다.

  "꿈을 꾸었나 보구려."

  그제서야 아내는 남편에게 미륵부처님을 만난 꿈 얘기를 했다. 남편 정씨는 비로소 그 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던 미륵부처님을 생각해 냈다.

  다음날 기도회향을 하고 곧바로 집에 돌아온 정씨 내외는 괭이를 들고 꿈에 보았던 밭으로 갔다. 그리고 둘은 열심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한참을 파들어 갔을 때 괭이에 찍히는 게 있었다. 미륵부처님상이 옆으로 누워 있었다. 정씨 내외는 미륵부처님을 파내 집에 모셔다 놓고는 아침 저녁으로 정성껏 불공을 드렸다.

  그렇게 불공을 드리기 백일이 지난 어느 날, 정씨 부인은 큰 잉어를 품에 안는 꿈을 꾸었다. 정씨도 듣고 틀림없는 태몽이라고 너무너무 기뻐했다.

  내외는 서로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들의 볼을 타고 내려오는 기쁨의 눈물도 계속되었다.

  "여보, 부인. 오늘부터는 힘든 일일랑 하지 마오. 내가 물도 길어 오고 불도 때 주겠소. 당신은 몸조심을 해야 하오."

  정씨 부인은 남편의 배려에 다시 한번 감격했다. 가난한 살림과 적적한 생활에 남편은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는 결코 가장이라 하여 혼자 뻐기거나 잘난 체하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자상한 남편이었다.

  그녀는 과연 태기를 느꼈다. 심한 입덧을 하였다. 하지만 모든 게 즐거웠다. 시간이 나면 늘 부처님을 염했고 늘 편안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모난 음식을 삼가하였고 비탈진 길을 걷지 않았다. 그녀의 태교는 철저하였다.

  그렇게 열 달이 되어 정씨 부인은 준수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야말로 옥동자였다. 금실이 유달리 좋은 정씨 내외는 부러울게 없었다. 천성적으로 착한 두 내외는 좀 가난하다는 게 불편하기는 했지만 생글생글 웃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금세 모든 고통은 사라졌다.

  정씨 내외는 미륵부처님의 가피를 잊지 못해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이 아침 저녁으로 감사기도를 올렸다. 공양도 지어 올렸고 과일이나 푸성귀나 일단 들어온 것은 먼저 미륵부처님께 올렸다가 내려 먹곤 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일년쯤 지나니 일은 그런대로 잘 풀렸다. 이웃집에서는 정씨 내외의 착한 성품을 높이 평가하여 소작거리를 많이 대 주었다. 정씨 내외는 부지런히 일했고 게다가 풍년이 들어 큰 수확을 거두었다.

  살림이 불어나자 그들 부부는 집 뒤에 전각을 짓고는 미륵 부처님을 모셨다. 이 전각을 당집이라고 하는데. 일설에는 미륵당이라고 한다.

  정씨 내외는 환갑을 맞았다. 그만큼 많은 세월이 흐른 것이었다.

  하루는 정씨가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가 미륵부처님의 은혜로 아무 어려움 없이 살아왔잖소? 부처님은 중생들에게 늘 보시를 가르치셨소. 그리고 착한 일 많이 하라고도 하셨소. 우리가 이제 살아야 얼마나 더 살겠소. 이번에는 우리도 좋은 일 한번 합시다."

  "어떤 좋은 일이 있을까요?"

  "내 의견은 이렇소. 우리집 재산 중 아들녀석의 몫을 제외하고는 우리보다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줍시다. 어차피 죽을 때 가져 가는 것도 아니잖소."

  부인은 정씨의 마음이 착한 데 대해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이토록 물욕이 없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 착한 남편덕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아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

  그들은 뜻이 맞았다.

  이튿날 그들은 음식을 장만하고 동네 사람들을 초청했다. 사람들은 마음씨 착한 정씨네 집에 무슨 경사가 있나 보다 하고 몰려들었다.

  한참 흥이 무르익어 갈 무렵 정씨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셨는지요. 사실은 오늘 우리 두 사람의 회갑입니다."

  "허!"

  사람들은 그제서야 몰랐다는 듯 미안해 하면서 정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오늘 이런 자리에서 꼭 말씀드리고자 함은 저희가 갖고 있는 재산에서 아들놈의 것 일부만 빼고 나머지는 다 모든 분들에게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

  "나누어 준다고요? 재산을요?"

  "그렇습니다. 저희 내외가 이렇게 아들을 얻고 넉넉하게 살아온 것은 모두 미륵부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회갑을 맞아 저희들은 모든 재산을 여러분에게 골고루 나누어 드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극락정토의 길을 닦고자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정씨 내외의 뜻이 하도 고마워서 말을 잇지 못했다. 정씨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꼭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전답 가운데서 가장 좋은 논 몇 마지기와 밭 몇 백평을 미륵부처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그야 여기 모인 우리도 찬성이지요."

  "거기서 얻어지는 수확으로 매년 미륵부처님께 공양을 올려 언제나 공양이 끊이지 않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뜻에 따랐다.

  그 뒤로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미륵부처님께 재를 올리고 있다. 재를 주관하는 사람은 일주일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공양을 올리는데, 자식 없는 아낙네들이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고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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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춤으로 병을 치료하신 관세음보살의 이야기



경흥국로는 신라 문무왕 때로부터 신문왕에 걸쳐 크게 활약한 고승이다.

국로라는 호칭은 국존이란 호칭과 아울러 국사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국사보다도 더 존경받을 만한 어른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경흥국로는 생몰 연대가 정확하지는 않으나 원효(617--686)스님과 동시대를 산 스님이라 추정되고 있다. 또한 원효 다음으로 가장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그의 전생애는 저술 활동에 바쳐졌다.

속성은 ()씨이고 웅천주(, 오늘날의 충남 공주) 사람이다. 열여덟 살에 출가하여 삼장에 통달하였다. 그는 삼랑사에 오래도록 주석했는데 그의 사상를 종합해 보면 법상종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국로에 추대된 것은 문무왕이 서거하면서 신문왕에게 신칙하였기 때문인데, 신문왕 원년(681)에 세상을 떠나기 앞서 태자이자 왕위에 오를 신문왕과 대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짐이 세상을 떠나간 뒤에도 언제나 부처님의 자비와 평등을 정치사상에 그대로 반영하여 나라를 다스려 가도록 해라. 그리고 삼랑사에 주석하시는 경흥화상을 국사로 받들도록 하라. 그 스님은 대단한 학승이며 우리 신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짐의 말을 명심하라."

"그 스님의 불교적 사상 갈래는 어느 쪽이옵까?"

"짐이 알고 있기로는 경흥화상의 사상적 갈래는 법상종에 해당한다. 법상종의 가르침은 우주만유의 본체보다도 현상을 세밀히 분류 관찰하는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 물론 거기서 도출되는 결과는 오로지 식일 따름이라고 하여 식이 모든 삼라만상 온갖 존재를 나타내게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법상종을 유식종이라고도 한다."

말을 마치고 문무왕은 눈을 감았다.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선왕의 칙령대로 경흥스님을 국사로 모시고 한 단계 더 추앙하는 뜻으로 (국로)라 호칭하였다. 경흥국로가 삼랑사에 머물면서 저술 할동과 국가자문역으로 정진하던 중 뜻하지 않은 병을 얻었다. 훌륭하다는 의원이 와서 진맥을 하고 좋다는 약은 다 써 보았지만 한 달이 넘도록 전혀 차도가 없었다. 신문왕도 근심에 싸여 어의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대는 짐의 주치의로서 짐 이외에는 다른 사람의 병을 볼 수가 없다. 하지만 경흥국로께서 입적하시게 된다면 우리 신라로서는 막대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대가 경흥국로의 병을 낫게 하도록 하라."

마침내 어의까지 동원되었지만 도저히 병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경흥국로께서는 안에 꼐시옵니까? 지나가던 객승 문안이옵니다."

사람들은 뜻하지 않게 나타난 비구니에 대해 야릇한 호기심을 일으켰다.

"어디서 오신 스님이신지?"

"지금 온 곳을 따질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국로께서 몸져 누우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문병하러 왔으니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당돌한 비구니의 위력에 눌려 시자는 비구니를 경흥국로에게 안내했다.

"어서 오시게. 어디서 오신 스님이신가?"

"큰스님과 같은 고향에서 온 사람입니다."

"나와 같은 고향이라고?"

"사람은 누구나 온 곳을 모르기 때문에 고향이 같을 수밖에 없지요. 그건 그렇고 스님의 병세는 좀 어떠신가요? 이렇게 늦게 찾아뵈어 송구스럽습니다."

"여전하네. 앞으로 좀 나아지겠지."

비구니스님은 국로가 누워있는 침상 곁으로 다가앉으며 손을 내밀어 국로의 이마를 만져 보고 손목을 잡아 진맥을 했다. 이윽고 비구니스님이 말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스님의 병환은 지나친 신경성입니다. 그리고 피로가 겹쳐서 생긴 병이므로 과로와 신경성를 풀어 버려야 낫습니다. 비록 비구니의 얘기라 할지라도 신우가 하는 말이라 생각하시고 들어 주십시오."

"원 별말씀을. 어서 말해 보시게."

"그러지요."

비구니는 말을 마치자 일어서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다. 병신춤이었다. 손과 발, 다리를 비틀기도 하고 몸을 꼬기도 하며 얼굴을 갖가지로 변화시키는 병신춤이었다.

그 비구니의 모습은 마치 11면 관음의 모습처럼 다양하기 그지없었다. 혹은 자비의 표정으로, 혹은 희자의 표정으로, 또 혹은 분노의 표정으로 얼굴 모습을 자유자재로 변화시켰다.

그 춤새가 하도 우스워 경흥국로는 자신이 국로라는 사실도 잊고 실컷 웃어 댔다. 나중에는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어 대는 바람에 밖에 있던 시자와 대중들과 다른 수 많은 사람들까지 모여와 비구니의 병신춤을 바라보며 삼랑사 경내는 온통 웃음의 도가니가 되었다.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도 했고 너무나 웃어서 배가 아프기까지 했다.

비구니의 병신춤이 끝났을 때, 경흥국로는 몸이 거뜬하다고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은 기적이었다. 그토록 한 달 남짓을 병마와 싸워 왔는데, 단 몇 시간 실컷 웃고 나니 아무렇지도 않게 병이 나아 버린 것이다.

비구니는 국사의 병이 완전히 나은 것을 확인하고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경흥국로와 시자들도 웃는 데 빠져 있어서 비구니가 돌아가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국로가 시자에게 말했다.

"아까 그 비구니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아느냐?"

"잘 모르옵니다."

"그러면 빨리 뒤를 밟아 거처를 알아오도록 해라."

", 큰스님."

그렇게 해서 시자는 비구니가 사라진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비구니는 석장을 짚고 남항사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남항사는 삼랑사 남쪽에 있는 절이었다. 뒤따르는 경흥국로의 시자가 걸음을 빨리하여 남항사 앞에 이르자 비구니의 모습은 이미 절 안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시자는 절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비구니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요사채에도 후원에도 뒤꼍에도 없었다. 마침 비구가 한 사람 요사에서 나왔다.

",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무슨...?"

"혹시 이 절에 비구니가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여기는 비구들의 처소입니다. 비구니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럼, 나이 30대 초반의 젊은 비구니가 이리로 들어왔는데 보셨습니까? 키는 자그마하지만 수려한 얼굴이던데?"

비구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시자는 생각했다.

'제가 가봤자 이 남항사지. 그새 어디로 갔을려고.'

시자는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적으로 스님네가 절을 방문하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법당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 것이었다.

법당에는 11면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었다. 그 보살상은 대나무 석장을 짚고 있었다. 아까 경흥국로 방에서 본 바로 그 석장이었다.

시자는 그 길로 삼랑사로 돌아왔다.

"틀림없이 그 11면 관음보살이 경흥 큰스님의 병을 고쳐 주시기 위해 현신한 것이야. 내 짐작이 틀림없을 거야."

시자는 경흥국로에게 그가 본 대로 소상하게 말했다. 얘기를 듣고 난 경흥국로가 시자를 대동하고 남항사 법당 관음전에 이르러 보니 그 11면 관음보살이 바로 자신의 병을 낮게 한 비구니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국로는 관음강 앞에 합장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관세음보살님은

온갖 신통력을 구족하시고

지혜와 방편을 고루 닦으셨네.

관세음보살님은

사방세계 온갖 국토에

몸을 나타내지 않는 곳 없네.

나의 병든 몸 고쳐 주시고자

비구니의 모습을 보이시고

나의 마음 일깨우시고자

웃음이 명약임을 설파하셨네.

 

관세음보살님은

모든 중생의 자애로운 어머니

자식이 병들면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처럼

중생이 병드니

관세음보살은 병신춤으로

이 내 몸에서 고통을 제거하셨네.

! 당신은 진정 성자십니다.

당신은 진정 아름다우십니다.

당신은 진정, 저와

우리 모두의 의지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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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옹스님의 정혼한 여인 그리고 출가와 어머님 천도 이야기 




  이천군 이천면 관고리 북악에 자리한 영월암, 이 절의 본래 이름은 북악사였다. 이 영월암에는 유명한 마애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84년 12월 보물 제 822호로 지정되었다.

  영월암은 고려 때 고승이었던 나옹혜근스님(1320--1376)과 인연이 깊다.

  나옹스님은 왕명을 받고 밀양의 영원사로 가는 길이었다. 한양을 거쳐 이천에 당도했을 때 그는 북악에 있는 영월암을 한번 참배하고 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때 그의 세수는 57세, 법랍은 37세였다. 

  아직 환갑도 안 된 초로의 스님이었지만 웬지 겉늙어 보이는 모습에서 무엇인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는 듯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가 선정에 들어 어머니를 뵈오니 어머니는 천도가 되지 못한 채 중음신으로 구천을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비록 출가하여 대도인이 되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애욕과 집착에 의한 죄업으로 말미암아 새 몸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에게는 어머니를 천도해야 할 커다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원혜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동네 사람들의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했었다.

  일곱 살에 한문서당에서 천자문을 시작으로 학문은 시작되었다. 첫 해에 '천자문'과 '동몽선습', '계몽편', '효경', '명심보감'을 읽었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이해할 정도여서 가끔씩 동학들이나 훈장을 놀라게 만들었다.

  여덟 살 되던 해에는 '소학'여섯 편에 '오언당음', '칠언당음', '고문진보', '맹자', '중용', '대학'을 모두 암기했으며 또한 이해했다. 학문의 성과는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그 나이에 한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기도 했다.

  아홉 살 되던 해에 '논어'와 '서경'과 '시경', '춘추좌씨전', '예기'를 떼었으며, 열 살 때에는 '주역'과 역사를 새롭게 공부하기 위해 '자치통감'을 읽었다.

  4년간 그가 배운 것은 보통 사람은 10년 동안에도 다 이수하지 못하는 엄청난 양의 학문이었다. 그는 그 어린 나이에 이미 더 배울 것이 없었다. 그는 유교의 한계성을 느끼며 열한살 때부터는 제자백가의 학설을 섭렵하기 시작했고 음악과 미술, 조각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가 특히 재미를 붙였던 분야는 무술이었다.

  원혜는 그의 절친한 친구 서정과 늘 함께 있었다. 학문을 익힐 때도, 무술을 연마하고 거문고를 뜯을 때도 그들 두 사람은 떨어질 줄 몰랐다. 

  너무나 다정한 두 젊은이를 두고 그의 고향인 영해에서는 오히려 어떤 의심을 품기도 했다.

  원혜는 어느새 열일곱 살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그의 성을 따서 '이 도령'이라 불렀다. 그의 속성이 '이'씨였기 때문이다. 이웃 사람들은 그의 영민하고 천진한 성품을 높이 평가하여 이 도령이라면 더없이 좋은 사윗감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정혼한 여인이 있었다.

  원혜는 그녀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언제인가는 자신의 아내가 될 것이라는 데 있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둘은 마음이 잘 맞았다. 그녀의 이름은 애선이었다. 원혜는 애선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애선의 집에서도 오히려 그것을 편안하게 여겼고 지극히 내성적인 원혜도 부담감을 주지 않는 애선 낭자와 그녀의 부모들이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커다란 고민 한 가지를 그의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았다. 

  "내가 아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애선이같이 집안도 없는 애를 며느리로 맞는단 말이냐. 아무리 옛날에는 정혼한 사이였다 하더라도 이젠 안 된다. 그것도 너의 아버지와 걔 아비가 술김에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농담삼아 한 말이었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원혜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식을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인정치 않고 어른들 마음대로 혼인을 정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도 사실이다. 당사자들끼리는 서로 얼굴도 모르는채 부모의 뜻에 따라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어야 하는 사회제도가 불만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는 하면서도 너무나 이해타산을 따지고 이익과 손실에 대해 민감한 어머니가 싫었다.

  어쨌든 그는 애선과의 결혼을 성립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혼인이 결국은 당사자끼리의 결합이면서도 두 집안의 결합이라는 점을 그도 이해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어머니의 경우는 달랐다. 애선의 집안이 옛날과는 달리 실세에서 밀려났다는 것과 가난하다는 것이 큰 장애였다.

  한때는 애선이네 집안이 원혜의 집안보다 사회적 관료적 위치라든가 경제적인 면에서 몇 단계 위였었다. 그때는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버지보다 더 애선이네와의 혼인을 적극적으로 찬성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여름이 막바지 기승를 부리는 어느 날이었다. 애선의 부모는 원혜와 그의 절친한 친구 서정을 함께 자신의 집에 초대하고 그가 느끼고 생각하고 결정한 일들을 털어 놓았다.

  "여보게 원혜, 자네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네만 어쩔 수 없네. 자네의 어머니가 우리 애선이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계신 줄 이미 우린 알고 있었네. 그리고 우리 집안이 몰락한 것에 대한 자네 어머니의 태도를 좀더 이해하려고 노력했네. 하지만 우리로서는 역부족이더군. 그래서 우리는 서정을 사위로 맞기로 했다네."

  원혜로서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애선은 원혜와 그의 친구 서정을 동시에 만나 주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한편 생각하면 어머니가 반대하던 결혼이니까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다. 

  그는 망설였다. 사랑을 택할 것인가 우정을 택할 것인가. 그는 우정을 택하기로 마음 먹었다. 애선은 그렇게 하여 서정의 아내가 되었다. 아름다운 애선을 빼앗긴다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이 아팠지만 원혜는 둘의 행복을 빌어 주기로 했다. 그것이 그동안 정 주고 사랑했던 애선에게 취해야 할 자세라 생각했고, 가장 절친한 친구라 느껴왔던 서정에게 가져야 할 마음이라고 원혜는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정이 이름 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소식을 접한 원혜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토록 멀쩡하던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버리다니. 

  원혜는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 서정이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누구도 명쾌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서정의 문제는 서정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원혜 자신의 문제였다. 아니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문제였다. 사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원혜는 답답한 마음을 주체할 길 없었다. 그는 다시 서적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익혀왔던 서적을 온통 다시 읽었다. 제자백가서를 모조리 열람했다. 그러나 죽음이 무엇이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명쾌하게 설명한 대목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원혜는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나인가. 육신인가 마음인가. 육신이라면 육신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 그것은 영원히 생멸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나 아무래도 육신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었다. 원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육신은 아니다. 육신이 나일 수는 없다. 만일 육신이 나라고 한다면 내가 목숨이 끊어지고 나서도 시체로 남아 있는 내 육신이 사물을 볼 줄 알고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냄새도 맡을 줄 알아야 하고 맛도 볼 줄 알아야 한다. 부드러운 손길이 내 시신에 닿았을 때 나는, 내 시신은 그 부드러운 촉감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육신은 정녕코 내가 아니다.'

  그는 다시 정신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육신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분명코 정신이다. 정신을 나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정신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 육체를 떠나 가는 곳은 어디인가. 아니, 가는 곳이 없다고 치자. 그럼, 이디에 머문단 말인가. 그는 옛날 얘기를 떠올렸다.

  '옛날 어떤 사람은 죽어서 염라국에 갔더니 아는 사람이 거기 있었다고 한다. 얼굴이며 목소리며 걸음걸이며 모든 행동거지가 아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람은 정신만 가는 것이 아니다. 육신도 함께 가야 한다. 육신은 남고 정신만 간다면 어떻게 그가 아는 사람을 알아 볼 수 있겠는가.'

  원혜는 서정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 부호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부모님 몰래 집을 나왔다. 원혜는 그 길로 공덕산에 주석하던 요연선사를 찾았다. 원혜가 인사를 드리자 요연선사가 물었다.



  "여기 온 것은 무슨 물건인가?"

  원혜가 대답했다.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왔습니다만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나이다. 큰스님,어떻게 닦아야 하겠습니까?"

  요연선사는 원혜를 받아들여 머리를 깎아 주고 계를 주었다. 법명을 혜근이라 했다. 혜근은 사미 시절을 요연선사 밑에서 지냈다. 그는 시간이 나면 요연선사에게 나고 죽음의 큰 문제에 대하여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요연은 물끄러미 혜근을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요연선사가 혜근에게 말했다.

  "네가 풀고자 하는 생사대사에 관한 문제는 눈 밝은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눈 밝은 사람을 찾아야 할 게다."

  혜근이 물었다.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사옵니까?"

  "나로서는 알 수가 없구나. 네 스스로 찾아나서야 할 것이다."

  "스님께서 직접 일러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너를 깨우칠 만한 그릇이 못 된다. 자, 어서 떠나거라.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 법이다."

  말이 끝나자 요연선사는 아예 돌아앉아 다시는 혜근을 돌아 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요연선사 문하를 나온 혜근은 전국을 누볐다. 그러나 그를 깨우쳐 줄 선지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양주 화암사에 이르렀다. 그때가 1344년이었다. 그는 거기서 4년 동안 밤을 낮삼아 용맹정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나고 죽음의 문제를 풀었다. 그는 깨달음의 기쁨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혜근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경지를 체험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1347년,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 때였다. 연길 법원사에서 지공선사를 모시고 공부하기 2년, 그의 나이 서른 살 되던 해에 지공선사로부터 '나옹'이라는 호를 받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평산처림선사에게서 법의와 불자를 받았다. 그후 그는 귀국하여 고려 전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후학을 제접하고 중생 교화에 힘썼다.

  이날 영월암에 도착한 나옹스님은 지장보살상 앞에서 문득 어머니를 천도해야겠다는 생각을 내었다.

  '옛날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제자 중 양대 산맥의 하나였던 목련존자는 그의 어머니를 천도하기 위해 천승재를 베풀었다고 하는데, 나는 천승재를 베풀 만큼 넉넉하지는 못하다. 그러나 내가 나의 어머니를 천도하고자 하는 마음이야 목련존자에게 뒤지지 않으리라. 나는 기도하리라. 지장보살에게 기도하리라. 지금은 말세이니 불보살에게 기도함보다 나은 가피력은 없으리라.'


  그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목탁을 들고 지장마애보살상 앞에 섰다.

  "나무 남방화주 대원본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그의 기도는 철저하였다. 그는 잠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공양하는 것도 초월하였다. 그는 그렇게 49일간을 계속하였다. 회향을 하루 남겨 둔 전날 밤도 그는 철야정진을 하고 있었다.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가까워 올 무렵이었다. 지장보살상 전신에서 금빛 광채가 환하게 비쳐나오고 있었다.

  그는 혹시 햇빛을 받아 석조마애지장보살상이 금빛으로 빛나는 것은 아닌가 하고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하늘에는 아직 별들이 소근대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제 우리 어머님이 천도가 잘 되셨는가 보다. 이것은 지장보살님의 가피임에 틀림없다.'

  나옹스님은 지장보살님에 대한 기도가 성취되자 후학들에게도 지장 신앙에 관하여 많은 가르침을 폈다. 지금도 이천 영월암에 가면 그때 나옹스님이 지장보살상 앞에서 기도하던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남아 있다가 귓전에 울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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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창건과 장수사에 대한 김대성이야기 




  "단월이 시주하기를 즐겨 하면 하나를 베풀어 만 배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신이 항상 가까이 모시며 안락하고 장수할 것입니다. 단월이 시주하기를 즐겨하면 하나를 베풀어 만 배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신이 항상 가까이 모시며 안락하고 장수할 것입니다. 단월이 시주하기를..."

  점개스님의 염불 축원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마치 앵무새마냥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축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와 허공을 맴돌다가는 단월의 집으로 날아들어가곤 했다.

  점개스님은 서라벌 내 흥륜사에서 나온 화주승이었다. 나이는 이제 마흔을 조금 넘을까 말까한 정도였으나 그의 걸음걸이는 노숙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어느 모로 보나 큰스님의 행동거지와 음성이었다. 지나는 사람들은 점개스님의 외모와 음성에 경외스런 시선을 보내곤 했다.

  점개스님의 복안장자의 문 앞에 이르니 문을 지키던 하인이 넙죽 절을 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큰스님. 오늘은 어떤 복을 나누어 주고 가시렵니까?"

  점개스님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하인들에게 말했다.

  "복이라! 암, 나누어 드려야 하구말구. 옛소, 복받으시게나."

  점개스님이 주장자를 날렸다. 주장자가 표르르 날더니 하면 들 앞에 툭 떨어지며 땅에 꽂혔다. 그러자 그 주장자에서 갑자기 새순이 돋더니 순식간에 숲을 이루고 새들이 깃들였다. 하인들은 생전 처음보는 점개스님의 신통력에 벌리니 입을 다물줄을 몰랐다. 그들은 환희심에 들떠 점개스님에게 수없이 절을 했다.

  그러나 점개스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나무에 손을 댔고 나무는 다시 주장자로 돌아왔다. 점개스님이 말했다.

  "복안장자에게 전하시게나. 밖에 점개라고 하는 한 비구가 화주를 하러 왔노라고. 그리고 이렇게 축원하더라고 전하시게. 단월이 시주하기를 즐겨 하면 하나를 베풀어 만 배를 얻고 천신이 항상 가까이 모시며 안락하고 장수할 것이라 하더라고"

  한편 하인의 말을 들은 복안장자는 즉석에서 비단 50필을 불사에 보태라며 시주하였다.

  이 복안장자의 집에는 또 다른 하인 모자가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결조라 했고 아들은 대성이라 했다. 이들 모자는 원래 모량리 사람이었는데, 일찍이 가장에 세상을 떠나가 살기가 너무 힘들어 복안장자의 집안에 들어가 온갖 잡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마음씨가 후덕한 복안장자는 논밭 몇 마지기를 떼어내어 이들 모자에게 주고, 또한 해마다 새경을 후하게 베풀었다.

  대성도 이제는 소년티를 벗어나 열댓 살이 되었고, 어엿한 청소년기에 접어들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머리도 매우 총명하여 복안장자는 대성을 지극히 총애하였다. 때마침 복안장자가 시주하는 것을 지켜 본 대성은 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어머니 경조에게 달려갔다.

  "어머니, 어머니. 매우 중요한 일이 있어요."

  "뭔데 그리 호들갑이냐?"

  "네, 흥륜사에 계신다는 점개스님께서 화주를 하러 내려오셨는데 그 스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축원을 하고 계셨어요."

  "재미있는 축원?"

  풀을 뽑던 여인은 아들의 말에 호기심이 났는지 손을 털며 아들의 얘기를 듣고 싶어했다. 소년 김대성이 말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만일 단월이 시주하기를 즐겨하면 하나를 베풀어 만 배를 얻을 것이요, 천신이 항상 가까이 모시며 안락하고 장수할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를 베풀어 만배를 얻는다고요, 어머니!"

  "그래, 그렇기는 하다만 우리가 뭐 가진게 있어야 보시를 하든 말든 하지."

  "어머니, 우리는 복안장자가 주신 논밭 몇 마지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 논밭을 부처님께 바치면 어떨까요?"

  여인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나마 있는 논 밭을 불전에 시주하면 우린 뭘 먹구 사느냐. 아무래도 그건 좀 어려울 것 같구나."

  "어머니, 우리는 복안장자의 집에 있는 한 먹고사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러니 제 말대로 그렇게 하셨으면 해요. 우리가 금생에 이처럼 가난하게 사는 것도 모두 전생에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만일 금생에 또 베풀지 않으면 내생에는 더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생활을 할지 누가 알겠어요?  그러니 그렇게 하세요, 어머니."

  여인은 아들의 보챔을 이기지 못해 허락하였다.

  "그래, 네 소원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려무나. 설마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느냐?"

  대성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논밭 문서를 들고 가서 점개스님에게 바쳤다.

  "우리의 전 재산이에요. 부처님께 잘 기도해 주세요."

  점개 스님은 대성이 올리는 밭문서와 논문서를 받고 축원하였다.

  "부처님은 대자대비하신 분이니, 너의 소원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아무 염려 말거라. 너는 네가 베푼 것의 만 배 이상을 얻으리라."

  소년 김대성은 마음이 흐믓했다. 세상은 버린 자의 것이라던 어느 스님의 말이 떠올랐다. 모두를 버릴 때 모두를 얻는다고 했다. 주려 끼고 있으면 마음은 그 끼고 있는 것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라고 했다.

  한낮의 햇살이 산산히 부서져 내리며 들판이고 계곡이고 집이고 산등성이고를 가리지 않고 비쳤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김대성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 경조는 땅을 치며서 통곡했다.

  "불전에 시주하면 시주한 것의 만 배를 얻고 길이 안락하며 천신이 가호하고 장수를 누린다더니 말짱 헛말이었구나. 세상에,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그 어린 나이에 데려가다니, 아이고 아이고 내 팔자야!"

  얼마를 울다가 지쳐 쓰러져 잠이 든 그녀는 꿈을 꾸었다. 꿈에 아들 대성이 나타나 말했다.

  "어머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소자는 이제 우리가 불전에 시주한 공덕으로 서라벌 김문량의 가문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업에 이끌려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라 복 지은 인연 공덕으로 짐짓 몸을 버리고 새 몸을 받아 나는 것입니다. 어머니 부디 만수무강하세요. 열 달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대성아! 대성아! 대성아! "

  사라져가는 대성을 부르다가 깨어 보니 꿈이었다. 그녀는 꿈이 하도 선명하여 서라벌의 대신 김문량 댁을 언젠가 방문해 보리라 마음 먹고 대성의 장례식을 간소하나마 정성껏 치렀다.

  한편 서라벌의 대신 김문량은 적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벼슬은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나 아들을 얻지 못해 늘 그것이 근심이었다.

  (내 비록 재상이 되었으나 아들을 얻지 못했으니, 아무리 지위가 높고 재산이 많은들 어디에 쓰리오. 어찌하면 아들을 얻을 수가 있을까?)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공중에서 소리가 있었다.

  "재상 김문량 공이여! 너무 그리 고적해 하지 마오.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 그 대신 그대는 부처님을 위해 뭔가를 하겠다는 큰 원을 내시오. 그러면 부처님께서 그대에게 아들을 얻도록 가피할 것이외다."

  김문량은 소리가 나는 쪽을 햐해 문을 활짝 열고 마루 끝에 나서며 하늘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추녀 끝으로 보이는 하늘을 주시하고 있는데 다시 소리가 들렸다.

  "아들을 얻게 되거든 그 아들을 위해 큰 불사를 하도록 하시오."

  김문량이 소리 나는 쪽으로 얼른 고개를 돌리니 누군가 말을 마치고 표표히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는데, 자세히 보니 그는 영락없는 관세음보살이었다. 재상 김문량은 관세음보살이 사라진 곳을 향해 수없이 절을 했다. 그 산이 바로 남산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얼마 안 되어 김문량은 다시 꿈을 꾸었다.

  "모량리의 김대성이가 그대의 집에 태어나리니 잘 길러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하시오."

  김문량이 꿈을 깨고 다시 부인을 불러 꿈 이야기를 하자 부인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했다. 다만 부인의 꿈은 몇 마디가 덧붙여 있었다고 했다.

  "그 김대성이 본디 모량리 사람인데 서라벌의 갑부 복안장자의 집안에 살고 있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경조라고 한다. 그 김대성이가 오늘 아침나절에 몸을 버리고 그대의 태내에 들었다." 

  부인과 자기의 꿈을 종합하여 검토한 김문량은 사람을 시켜 복안장자네 집에 그러한 사실이 있었는가를 알아보게 하였다. 이윽고 하인이 달려와 보고하였다.

  "주인대감 내외분께서 꾸신 꿈이 그대로 사실이옵니다. 김대성이는 열댓 살난 소년이었는데 오늘 아침나절 갑자기 세상을 하직했다 하옵니다.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과연 그 일이 있고 나서 김문량의 부인은 태기를 느꼈다. 유달리 입덧을 심하게 하는 부인을 보고 김문량은 틀림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부인의 입덧이 있고 7개월쯤 지나 부인은 아기를 낳았다. 순산이었다. 그런데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왼쪽 주먹을 말아 쥔 채 펴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아기가 주먹을 펴지 않아 김문량은 점술가를 불렀다. 점술가가 말했다.

  "이 아기는 전생의 어머니가 오시기 전에는 절대로 손을 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전생에 누구였는가를 증명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니 이 아기의 전생 어머니를 부르십시오."

  "허, 그것참! 여봐라. 이 서라벌 내의 갑부 복안장자의 집에 가서 경조라는 여인을 모셔오도록 하라."

  "에이"

  분부를 받은 하인이 복안장자의 집에 이르러 경조 여인을 데리고 왔다. 그러자 아기는 태어난 지 일 주일밖에 안 되어는데도 생글 생글 웃으며 주먹을 폈다. 그런데 그 손바닥에는 '대성'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김문량은 비로소 모든 것이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믿고 아이의 이름을 그냥 대성이라 부르게 하였다.

  대성은 무럭무럭 잘 자랐다. 머리가 총명하여 열두서너 살이 되자 이미 학문의 높이를 가늠할 수 없게 되었고 또 무예를 익혀 활쏘기, 말달리기, 창과 칼쓰기와 수레몰기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대성은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곰 사냥을 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날이 어두워져 더 갈수가 없게 되자 대성은 산 아래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곰 사냥을 하고 난 대성은 들뜬 기분에 잠도 잘 오질 않았다.

  (아! 나는 곰을 잡았다. 나는 곰을 잡았다구 아마 서라벌안에서 나만큼 활을 잘 쏘는 사람은 없을걸.)

  그러다가 그는 잠이 들었다.

  (으악! 곰이다 곰!)

  그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었다. 곰이 말을 했다.

  "나는 네가 죽인 곰의 귀신이다. 네가 나를 죽였으니 이번에는 내가 너를 죽이리라."

  대성은 땀을 비오듯이 흘렀다. 대성이 마구 팔다리를 버둥거리면서 말했다.

  "네가 곰의 귀신이라면 정말 미안하다. 나는 죽는게 그다지 섧지가 않다. 다만 나는 전생의 어머니와 금생의 부모님을 함께 모시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니 한 번만 용서해 주렴."

  곰 귀신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더니 눈물을 흘리며 말헀다.

  "네 말을 듣고 보니 참으로 딱하게 되었구나. 하지만 나는 내 원수를 갚아야 겠다."

  곰의 귀신이 다시 달려들었다. 곰 귀신은 실제 곰보다 더 무서웠다. 더 날렵했고 더 컸다. 게다가 곰 귀신은 말을 할 줄 알았다. 대성이 생각했다.

  (나는 전생에 하도 가난하여 어머니에게 졸라 논 밭 몇마지기를 흥륜사 스님께 보시하고 금생에 그 공덕으로 명문대가 재상의 집안에 태어났는데 이제 와서 곰의 귀신에게 영락없이 죽게 되었구나 어찌한다?)

  그에게 순간적으로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곰 귀신이여! 내가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을 하면 나를 안 잡아 가겠는가? 가령 절을 지어준다면 어떻겠느냐?"

  절을 지어 준다는 말에 곰 귀신은 달려들던 동작을 멈추며 말했다.

  "절을 지어준다고 했겠다? 그렇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지. 만일 절을 지어 나를 위해 천도재를 지내 주고 또 나와 같은 모든 살아 있는 산짐승을 마구 죽이지 않은다면 그도 손해날 것 같지는 않구나. 꼭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꼭 그렇게 하겠다. 나만 잡아가지 않는다면 앞으로 사냥도 하지 않겠다. 미안하다 곰귀신이여!"

  꿈을 깨고 난 대성은 그길로 화살을 꺾어 버리고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 곰 사냥을 했던 자리에 절을 짓고 장수사라 이름하고 곰 귀신 천도재를 올렸다.

  대성이 장성하여 벼슬길에 나가자 대성의 전생 어머니와 금생의 부모도 모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어느날 대성은 부인을 불러 의논했다.

  "여보 부인! 부모님의 은혜는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높다고 했소. 나는 전생의 어머니와 금생의 부모님을 함께 모시고 살았는데 이제 그분들이 모두 세상을 뜨셨구려. 내 들으니 부모님 위한 가장 좋은 효도는 절을 지어 부처님께 바치고, 열심히 지극 정성으로 재를 올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던데 당신 생각은 어떠하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절을 짓도록 하시지요. 어차피 재산은 있는 것이고 당신도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리 어려울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대성은 부인의 말에 크게 감격했다.

  "고맙소 우리가 저승 갈 때 뭘 가지고 가겠소? 우리, 있는 재산을 모두 털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절을 지어 부처님께 바치고 부모님의 명복을 빌어드립시다."

  그렇게 해서 김대성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었다. 토함산 중턱 동쪽 기슭에는 석굴암을 지어 전생의 부모님의 명복을 빌었으며 토함산 남쪽 자락에는 불국사를 지어 금생의 부모님의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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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피부병 치료에 대한 문수동자와 고양이 이야기



  1455년에 등극한 세조는 1468년에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14년 동안 인과응보의 원리를 몸소 깨달았다. 


  하루는 세조가 침전에 들었을 때 꿈속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 왕후가 나타났다. 세조의 친형수였다. 현덕 왕후는 단종의 시해사건과 맞물려 세조의 세력이 무참히 짓밟히고 시해당한 여인이었다.


  "당신은 우리 단종의 숙부면서 조카인 단종을 죽였소. 그리고 형수인 내게도 죽음을 안겨 주었소. 천하에 당신 같은 불한당은 없을 것이오. 에잇 퇘퇘."


  세조는 꼼짝없이 현덕 왕후가 뱉는 침을 맞았다. 그녀의 침에는 역한 냄새가 났다. 너무나 참기 어려워 코를 쥐고 끙끙거리는데 옆에서 누가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중전이었다.


  "마마, 악몽을 꾸셨나 보군요." 세조는 땀을 비오듯 흘렸다. 중전이 손을 들어 세조의 이마를 짚어 보니 열이 상당히 높았다. 온몸이 그대로 불덩어리였다.


  "마마, 신열이 높습니다. 이 어인 일입니까? 어의를 부르겠습니다."

  "업보인가 보오. 이는 업보가 분명하오. 그러지 않고서야."

  "업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세조가 신음소리를 안으로 삭이며 간신히 말했다.

  "내가 조카를 몰아내어 죽게 만들었잖소. 그리고 형수인 현덕 왕후마저도. 그런데 꿈에 현덕 왕후가 나타나 나를 꾸짖으며 내게 침을 뱉었소이다."


  "원, 저런!"

  세조는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나 눈은 더욱 말똥말똥해질 뿐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며 끙끙대는 세조의 눈 앞에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어린 단종을 안고 귀여워하던 일이며 단종이 왕위에 올랐을때, 어떻게든 그를 위해 일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뒤이어 자신의 측근들이 거사를 해야 한다고 종용하던 일과 그렇게 할 수 없다던 자신의 모습도 어른거렸다.


  마침내 측근의 종용에 못 이겨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었던 짓을 자행한 자신의 모습이 나타났고 그 위에 현덕 왕후와 귀여운 단종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튿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세조는 깜짝 놀랐다. 지난밤 꿈에 현덕 왕후가 나타나 침을 뱉은 자리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종기가 돋기 시작한 것이다. 그 종기는 온몸으로 퍼졌다.

  온몸이 가렵기 시작하더니 종기가 난 곳마다 살이 물러 터지고 악취가 코를 찔렀다. 세조는 어의를 불러들였다. 진맥을 마친 어의가 말했다.


  "상감마마, 황공하옵게도 마마의 병은 세간의 약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옵니다."

  세조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이냐?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어의가 대답했다.

  "소신이 알기로는 업보의 병이라 업을 녹이는 것이 우선 급선무일 것 같사옵니다. 마마, 황공하오나 명산대찰을 찾아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옵소서."


  세조가 말했다.

  "그것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것, 짐이 먼저 국법을 어길 수는 없는 게 아니겠는가."

  "하오나 마마, 상감이 계시고 나서 국법이 있는 것이옵니다. 아무리 국법이라 해도 일단은 상감마마께서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니 방편이라 하겠나이다."

  "방편이라?"

  "그러하옵니다. 따라서 마마의 행차를 비밀리에 하오시면 되오리라 봅니다."

  그렇게 해서 세조는 시종 한 사람만을 대동하고 명산대찰을 찾았다. 오대산 월정사로 갔다. 월정사에서 기도를 드리고 난 세조는 상원사로 향했다.




  길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이 너무나도 맑았다. 세조는 어린시절 시녀들 틈에 끼어 멱감던 일이 생각나 혼자 빙그레 웃었다.

  '참, 천진난만한 시절이었지. 그때가 좋았어. 어른이 되고 나니 세상살이가 너무 복잡하구나.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세조는 문득 멱을 감고 싶어졌다. 그 동안 남 앞에서 몸을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맘대로 옷을 벗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종 한사람만 있을 뿐이었다. 세조가 시종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 멱감고 싶지 않느냐?"

  시종이 손을 모으며 말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전하 앞에서 어떻게 감히..."

  "그럴 것 없느니라. 우리 함께 들어가 멱을 감는 것이다."

  그리고는 세조가 먼저 옷을 벗고 맑은 물에 몸을 담갔다. 시종도 조금 떨어진 개울 아래쪽에서 멱을 감았다.

  그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미승이 세조의 멱감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세조의 몸은 온갖 추한 종기로 덮여 있었다. 세조가 사미를 보고 말했다.

  "이리 와서 내 등을 좀 밀어 주련?"

  사미가 옷을 벗고 곁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는 세조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사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세조의 몸에 났던 종기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조는 잘 모르고 있었다. 다만 시원하다는 느낌만을  가졌을 뿐이다.




  사미가 등을 다 밀고 나자 세조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당부의 말을 남겼다.

  "고맙다. 그런데 어디 가거든 임금의 옥체를 씻어 드렸다는 말은 하지 말아라."

  사미승도 웃으며 말했다.

  "대왕께서도 어디 가거든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문수동자라고?"

  그러나 이미 그때는 사미가 사라진 뒤였다. 자기 몸을 들여다보니 종기가 말끔히 사라졌다. 세조는 너무나 감격했다. 또한 부처님의 신력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로는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왕의 직권으로 부처님을 옹호하는 쪽으로 정치를 펴리라. 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은혜도 갚고 업보도 소멸하고...'


  왕은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는 조선에서 제일가는 화공을 불러들였다. 그에게 세조는 자신이 본 문수동자의 상을 그리도록 명하였다.

  몇 번의 수정을 거쳐 마침내 문수동자상은 완성되었다. 세조는 그 그림을 상원사에 봉안하도록 했다. 지금은 나무로 조각한 문수동자상이 있지만, 그때 그렸던 그림은 역사의 어느 갈피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세조가 의관을 벗어 걸고 목욕하던 곳을 "갓걸이" 또는 "관대걸이"라고 불려 오고 있다.

  하여간 병을 고친 세조는 이듬해 봄 상원사를 찾았다. 세조는 법당으로 들어갔다. 법당에는 여전히 문수동자상이 탱화로 모셔져 있었다. 세조의 반가운 마음은 이를 데가 없었다.

  그가 막 예불을 올리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자꾸만 어의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세조가 뒤를 돌아보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고양이 한 마리가 곤룡포 자락을 물고 있었다. 세조는 뭔가 이상한 조짐을 느꼈다.


  신하를 시켜 법당 안팎을 살피도록 어명을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부처님을 모신 탁자 밑에 구세대 측근에서 보낸 자객이 칼을 들고 숨어 있었다.

  세조의 문초에 따라 그들의 정체는 드러났다.


  고양이는 이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세조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고양이에게 어떻게든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강릉 땅에서 가장 기름지다고 알려진 논 5백 섬지기를 상원사에 바쳤고 해마다 고양이를 위해 축제를 베풀도록 명했다.


  그때부터 절에는 묘답이니 묘전이니 하는 말이 생겼고 절에서 고양이를 기르게 되었다. 고양이를 죽이는 자에게는 엄청난 형벌이 내려져 고양이 보호에도 한몫을 했다.

  고양이 사건이 있고 나서 세조는 다시 상원사를 찾았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도량 상원사를 중창하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성지로서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서였다.

  상원사 대중들과 자리를 함께한 세조는 상원사 중수에 대한 의논을 하고 있었다.

  그때 공양시간을 알리는 목탁이 크게 두 번 내리 울렸다. 세조는 스님들과 함께 공양에 참석하였다. 대중들은 세조와 함께 공양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황송하였다.


  "전하, 자리를 따로 마련했사오니 옮기시옵소서."

  세조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느니라. 내 스님들과 함께 공양하겠으니 스님들은 괘념치 말라."

  그래도 스님들은 자리를 옮기기를 권했고 세조 또한 소탈하게 거듭 웃으면서 같이하자고 했다. 그때 말석에 앉았던 어린 사미가 공양발우를 쳐들고는 세조를 향해 말했다.


  "이처사님, 어서 공양을 하시지요."

  대중들은 이 느닷없는 사미의 행동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몸둘 바를 몰라 하였다. 대왕을 보고 "이처사"라니 얼마나 당돌한 호칭인가.


  물론 스님들도 "처사"라는 호칭이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세간 사람들을 부를 때는 나이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남자신도는 처사라고 불렀다. 처사란 "세간에 처한 보살"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왕을 보고 처사라 하니 잘못하면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국이었다.

  그때 세조는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과연 도인될 자격이 충분하구나."

  세조는 그 사미에게 종삼품의 직을 내렸다. 아울러 붉은 천을 감은 허리띠, 즉 전홍대를 하사하였다. 세조는 전날 상원사 계곡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자신의 병을 고친 것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어린 아이들에게는 귀하게 되라는 표시로 붉은 허리띠를 매어 주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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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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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롱아씨와 호랑이 그리고 두운스님의 희방사 창건과 수철교 이야기


  원주, 제천을 지나 희방역이 있다. 이곳에서  한참 걸어가면 소백산 줄기 연화봉 아래 자리하고 있는 절이 바로 희방사이다. 


  이 희방사는 호랑이와의 인연에 의해 지어졌다는 매우 독특한 창건설화를 갖고 있다.

  태백산 심원암에 두운조사라는 고승이 주석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운수행각이 하고 싶어진 두운스님은 바랑을 챙겨 심원암을 떠났다. 꽤 많이 걸었으리라 생각하고 닷새째되는 날 소백산으로 찾아들었다. 산세를 보아하니 줄기차게 뻗어 내린 그 중턱에 마치 연꽃봉오리를 연상할 수 있는 조그마한 산봉우리가 있었다. 둘레를 쭈뼛쭈뼛 살피던 두운스님은 마침내 천연동굴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천연동굴 외에 초암을 하나 더 짓고 광으로 사용했다.

  어느 해 추운 겨울날이었다. 소백산은 눈이 내렸다 하면 보통 장정의 키를 넘곤 했으며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그 눈이 녹았다. 밖에는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두운스님은 눈오는 밖을 내다보며 감상에 젖어 있었다.

  밤이었다. 눈은 멎었고 달은 한껏 밝게 비치고 있었다. 홀로 고독을 삼키며, 설경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부엌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두운스님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부엌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순간 그 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집채만한 호랑이가 고개를 빼고 쭈그려 않아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어 보니 호랑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두운스님은 생각했다.

  '저놈이 필시 배가 고픈 게로군.'

  두운스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웃통을 벗어 던지고 호랑이 앞으로 성큼 나갔다.

  "자, 나를 먹어라. 내 너에게 이 육신을 보시하겠다. 나는 불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일가칠척 하나 없는 혈혈단신이다. 거칠게 전혀 없으니 눈물만 짓지 말고 어서 그 주린 배를 채워라."

  그러나 호랑이는 오히려 한걸음 뒤로 물러설 뿐 덤비려 하지 않았다. 두운스님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호랑이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호랑이는 떡하니 입을 버리고 있었다.

  '이놈이 아무래도 목에 뭐가 걸린 모양이야. 뭘까. 생선가시? 아니, 그럴 리 없지, 호랑이가 생선이나 잡아먹고 살아갈 놈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고개를 이리저리 기웃거려 봐도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팔을 걷어 부치고 입을 버릴 고 있는 호랑이에게 달려들어 입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뭔가 잡히는 게 있었다. 그는 직감으로 그것이 여인의 비녀임을 알았다. 다음 순간 그의 손에는 호랑이 침과 뒤범벅된 비녀가 잡혀 나왔다.

  순간 두운스님의 입에서 벽력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놈. 이 고얀 놈. 아무리 배가 고프기로서니 사람을 잡아먹어? 이놈 내가 당장 너를 때려죽이고 싶으나 살생을 금하는 불도를 닦는 사람으로 너와 같은 업을 짓고 싶지 않아 살려 주는 것이니 차후에 한 번 더 사람을 해치는 일이 있다면 용서하지 않으리라. 이놈."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두운스님은 자신에게 내심 놀랐다. 호랑이 앞에서 큰소리를 치고 있는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당장 물러가거라. 이놈."

  호랑이는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두어 번 주억대고는 어슬렁거리며 부엌을 빠져나갔다. 호랑이가 가 버리고 난 산사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들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두운스님은 마음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우리 부처님은 설산에서 고행하실 때 한번 자리에 않으시면 6년 동안 꼼짝도 하지 않으셨다는데 나는 이 무슨 꼴인가. 부처님은 얼굴에 거미줄이 엉기고 머리에는 새들이 둥지를 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셨다는데 나는 이게 무슨 모양인가. 아, 벌써 서른 고개에 올라섰으니 언제 마음을 깨칠까.'

  그때였다. 초암 앞마당에서 쿵하고 소리가 들렸다. 두운스님은 머리 끝이 쭈뼛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 생사를 초월하려면 멀었나 보군. 이렇게 무서움을 느끼는 걸 보면.'

  그는 그러면서 자신을 향해 한 번 피식 웃고 방문을 열어제쳤다. 방문 바로 앞에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않아 있었다. 두운스님은 밖으로 나갔다.

  "이놈, 이번에는 못된 짓을 하다가 구해 달라고 온 것이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곤두박질을 칠 뻔하였다. 뭔가 시커먼 물체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손에 잡히는 게 분명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두운스님은 등불을 준비하여 다시 밖으로 나가 보니 그것은 멧돼지였다. 호랑이 발톱과 이빨자국에서 선지피를 흘리고 있었다. 두운스님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이놈, 네가 영물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구나. 중이 고기 먹는 것을 보았더냐? 어서 너나 가지고 먹어라. 그리고 다시는 이런 물건을 절에 물고 들어와서는 안된다. 가거라."

  호랑이는 고개를 다시 주억거리더니, 그 멧돼지를 물고 어둠에 묻혀 버렸다.

  다음날이었다. 두운스님은 멧돼지 피를 깨끗이 씻어 내고, '오늘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공부하리라'하고 정진에 들어갔다. 아침에 시작한 정진은 점심도 잊어버리고 저녁 공양조차 건너뛰었다. 그는 완전히 삼매에 몰입해 있었다. 그는 백골관을 닦고 이었다. 

  '이 몸이 죽고 나서 세월이 흐르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백골뿐이리라. 아, 집착할 수 없는 백골이여! 그런데 중생들은 그 쓸모 없는 백골에 집착하여 악을 저지르고 있구나. 내가 생사를 초월하지 못해 호랑이에게서 두 번씩이나 무서움증이 일었으니 이 모두는 백골에 대해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산야에 백골만이 흩어지리라. 아! 집착할만한 것이 못되는 백골이여.'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열 여드렛날 밤의 달은 이슥해서야 산머리에 교태를 드러냈다. 주위는 고요했고 산은 온통 흰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찬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는 소리가 나더니 뒤이어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운스님은 그 소리에 선정에서 깨어났다. 두 번이나 호랑이가 다녀간 뒤였기에 오늘밤도 분명 호랑이의 짓일 거라고 생각한 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문을 열었다. 밝은 달빛 아래 과연 호랑이가 쭈그리고 않아 있었다. 그런데 그 앞에 웬 물체가 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일까 하고 나오던 두운스님은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다.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아주 젊은 여인을 물어다 놓은 것이었다. 달빛을 이용하여 가까이 살펴보니 20을 전후한 묘령의 여인이었다. 두운스님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호랑이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네, 이놈, 전에 그렇게 타일렀는데도 또 못된 짓을 했구나. 이놈 당장 물러가거라."

  두운스님은 우선 사람을 만져 보았다. 몸은 얼음장처럼 굳어있었으나, 아직은 숨기운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망설였다. 출가사문이 여인의 몸에 손을 댈 것인가. 그렇게 되면 불계를 파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보다 대승적인 자세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여인을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여인의 온몸을 찜질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살결은 아름다웠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아직 본적이 없는 두운스님의 가슴은 방망이질을 해 댔다. 그는 팔다리를 주무르고 배를 문질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인이 깊은 숨을 몰아쉬면서 꿈틀댔다.

두운스님은 기뻤다. 사람을 자기 손으로 소생시켰다는 데에서 어떤 뿌듯함을 느꼈다.

  "좀 정신이 드십니까?"

  여인이 두운스님을 보자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려다가 다시 쓰러지면서 힘없이 말했다.

  "여기가 어딘가요?"

  "소백산 내에 있는 토굴입니다. 소승은 수행하는 수도승입니다."

  "스님이시라고요? 아니요, 그럴 리 없습니다. 당신은 호랑이가 분명합니다."

  내가 호랑이라니요. 아마 무서운 꿈을 꾸셨나 보군요. 소승은 분명 사람입니다. 소승의 이름은 두운이라 합니다."

  "호랑이가 스님의 모습으로 둔갑을 잘한다고 하던데요. 제 기억으로는 호랑이의 난을 만난 게 분명합니다. 당신은 분명 호랑이입니다."

  두운은 비로서 여인이 자기를 두고 호랑이라고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아가씨가 호랑이 난을 만나 너무나 놀란 나머지 소승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소승은 수도승이고 이곳은 절이 맞습니다. 그리고 아가씨를 물고 온 호랑이는 지금 밖에 있을지 모릅니다. 자, 보시지요."

  두운이 물을 열자 호랑이는 아직도 밖에서 쭈그리고 앉아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는 듯하였다. 그리고는 적이 만족한 모양인지 기지개를 늘어지게 펴더니 어슬렁거리며 사라져 갔다.

  여인은 비로서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제 분명히 기억납니다.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도 모두 말입니다. 말씀드려도 되올는지..."

  그녀는 두운스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운스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저는 경주 서라벌 계림에 사는 호장 유석의 딸 유아롱입니다. 호장이라면 고을 아전 중 최고 윗자리여서 저희집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입니다. 오늘 낮에 저는 혼례를 치렀습니다. 대례를 치르고 폐백이 끝나 밤이 되자 저는 신방에 들어갔습니다. 바로 그때 무슨 불이 번쩍하면서 제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뒷일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아롱 아가씨의 얘기를 듣고 있는 두운스님의 손에는 땀이 고였다. 본인이야 어떻든 말들 두운스님으로서는 아찔한 이야기임에 틀림없었다.

  "아, 그랬군요. 그러면 아직 초야도 치러 보지 못한 순결한 아가씨가 틀림없겠군요. 난 또."

  아롱이 약간 서운한 눈빛으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스님은 저의 순결에만 관심이 있고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전혀 무심하시군요."

  두운스님은 아차 싶었다.

  "그렇군요. 그래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정말 큰일날 뻔 하셨습니다.

  두운스님은 어색하게 뒤통수를 만지며 말했다.

  "부모님과 신랑이 걱정 많이 하시겠습니다.  그나저나 신랑은 잘 생겼습니까? 마음에는 드시던가요?"

  그렇게 물으면서 두운스님은 또 한 번 실언했구나 싶었다.

공연한 것을 물었다고 생각했다. 웬지 자꾸 딴 얘기가 튀어나와 연신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이 여인의 신랑을 두고 질투하는구나. 그래서는 안 되는데, 나는 어디까지나 불도를 닦는 수행자가 아닌가?'

  여인이 말했다.

  "글쎄요. 저는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호랑이란 본디 육식동물이라서 사람을 보기가 무섭게 잡아먹어야 할텐데 어찌하여 저를 이 깊고도 험한 산중까지 업고 와 그냥 버리고 갔을까요? 의심스럽습니다."

  "아무래도 전생의 인연이겠지요."

  "전생의 인연이라니요?"

"이 산승과 인연이 깊은 탓일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나저나 잠이나 푹 주무시고 다음날 날이 밝으면 얘기합시다."

  그러나 산사에는 방이 한 칸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 방에서 함께 지내야 했다.

  '정말 내가 이 아롱아가씨와 인연이 깊은 것일까? 내 불쑥 말해 놓고 보니 그도 그럴 것 같은데, 아무래도 공연히 실언을 한 것 같네. 허, 그나저나 어쩐다?'

  대충 여인을 덮어 주고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싸아 얼굴을 때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아먹고 방으로 들어와 가부좌를 틀고 않았지만 도저히 정신 집중이 되지 않았다. 신경은 온통 등 뒤쪽에 누워 자는 아롱 아씨에게 쏠렸다.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하기를 몇 번. 다시 방안에 들어온 두운스님은 가만히 잠자는 아롱 아씨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려다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나는 중이다. 나는 불계를 받아 지니고 수행하는 수도자다. 나는 중이다. 나는 중이다. 중, 중, 중...'

  그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삼매에 들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쉽사리 삼맹에 몰입할 수 없었다. 답답했다. 20여 년 동안 수행한 결과가 이 정도라는 데에 회의도 느꼈다. 그는 이제 서른 고개를 넘어선 혈기 왕성한 젊은이였다. 승복으로 가린 그의 가슴에서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런 자신이 한없이 미웠다.

  그때였다. 아롱 아씨가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그는 고개를 돌릴까 하다가 꾹 참아 보았다. 여인이 가녀린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의 음성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어서 자기도 모르게 두운은 여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그만 주무세요, 스님. 으음."

  "산승은 이게 잠자는 모습입니다. 저는 누워서 잠자지 않고 않아서 잡니다."

  "스님, 배가 좀 고픈데요. 뭐 먹을 만한 게 없을까요?"

  두운스님이 먹을 것을 찾으러 부엌으로 나가려 하자 어느새 여인이 두운스님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한 번 해 본 소리예요. 그냥 않으세요. 그리고 아까 스님께서 전생의 인연이라 하셨는데 그 얘기나 들려주세요."

  "글쎄요. 아롱 아가씨와 부모님의 인연도 그렇고 신랑과의 인연도 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인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의 인연은 아무래도 호랑이와의 인연이 깊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호랑이와의 인연이라고요?"

  "사실 호랑이와 나와의 인연은 참으로 묘하게 맺어졌습니다."

  두운스님은 그 동안 호랑이의 목에 걸린 여자의 비녀를 빼내 준 이야기며, 멧돼지를 물고 왔던 이야기 등을 자세하게 해 주었다.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두운스님의 얘기를 듣고 난 아롱아씨가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렇다면 호랑이가 스님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저를 데려온게 아닐까요?"

  "그렇다고 봐야지요. 그런데 아가씨를 데려온 것은 은혜를 갚기보다는 인연을 맺어 주기 위함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참 재미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가는데 저는 호랑이를 타고 시집을 왔으니 말입니다."

  "시집이오?"

  두운스님은 소스라치게 놀라 물었다.

  "그렇잖습니까?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보통 남자들에게 가는데 저는 산중에서 수도하는 스님에게 왔으니까요."

  두운스님이 말을 잘랐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아롱 아가씨는 여기 나한테 시집을 온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 인연을 맺기 위해 온 것입니다."

  "스님의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생각해 보십시오. 부처님과 인연을 맺기 위함이라며 이 먼 곳 깊은 산중까지 오지 않더라도 서라벌에는 수많은 절들이 있고 큰스님들이 있습니다."

  듣고 보니 아롱 아씨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두운스님은 할 말을 잊었다.

  "스님, 저는 스님과 인연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정식으로 혼례를 치를 수도 없어도 스님은 바로 저의 낭군이십니다. 부정하지 마시고 저를 받아들이십시오."

  두운은 점점 난처해졌다. 아니 아롱 아씨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더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완강하게 거부했다.

  "안 됩니다.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왜 안 되옵니까?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여기는 우리 둘밖에 없고 또 나중에 우리가 아무리 순결을 지킨다 해도 누가 그것을 인정하겠습니까? 스님, 어서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여인이 달려들었다. 두운스님은 가만히 여인을 떼어놓으며 말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린 그럴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때 여인이 훌쩍이기 시작했다. 흐느끼는 여인의 두 어깨가 가볍게 출렁이고 있었다. 두운스님에게는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걸려들었다 싶었다. 당장 달려들어 마음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여인의 눈물에 강해져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두운스님은 여인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남이야 믿건 말건 상관없습니다. 우리만 순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 말씀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즉, 나이가 많은 여인은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한두 살 연상이면 누님처럼 여기며, 나이가 적은 여인이라면 누이동생처럼, 딸처럼 생각하며, 또는 일가친척처럼 생각하라구요. 그래서 나는 앞으로 아롱 아씨를 누이동생으로 생각하겠소. 아롱 아씨도 나를 친오빠로 여겨 주시오. 새봄이 되면 내가 아롱 아씨를 서라벌 계림의 집에 데려다 주겠소. 우리 그 동안 불도나 열심히 닦읍시다."

  두운스님의 말을 듣고 나서 아롱 아씨는 고개를 들어 스님을 쳐다봤다. 참 장하고도 잘생긴 모습이었다. 장부다운 기상이 넘쳐흘러 혼례를 치루었던 신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멋진 남자였다. 그러나 스님이 워낙 완강하기 때문에 마음이 아팠지만 그를 따르기로 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자존심을 꺾어야 함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두 사람은 좋은 도반이 되었다. 눈이 내리면 눈을 쓸고, 밥을 지어 함께 공양을 하고, 함께 가부좌를 틀고 않아 선정에 들었다. 아롱 아씨의 마음도 이젠 많이 가라앉았고 두운스님 또한 친절하게 공부를 지도했다.

  어느덧 추운 겨울이 물러가고 그 빈 자리에 봄이 들어앉았다. 눈도 다 녹았다. 이젠 어디를 떠나더라도 눈 때문에 막힐 일은 없었다.

  두운스님은 아롱 아씨를 다정하게 불렀다.

  "아롱, 이제 내가 할 일이 있소. 눈도 녹았고 봄도 다가왔으니 내가 처음 아롱에게 약속한 대로 서라벌의 계림에 있다는 당신 집에 아롱을 데려다 주려 하오. 그러니 행장을 꾸리시오."

  아롱 아씨는 사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다정하게 지도해 주는 두운스님에게서 친오빠와 같은 정을 느꼈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이 산중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탐욕과 질투와 온갖 번뇌, 갈등으로 얽매여 사는 세속의 삶이 싫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스님에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하지만 두운스님은 그럴 수 없다며 일단 다시 오는 한이 있더라도 부모님을 찾아 뵙고 딸이 살아 있음을 알려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신랑과의 관계도 이어지든 끊어지든 깨끗하게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소백산을 떠났다. 경주까지는 6백 리가 넘었으므로 거의 열흘이 지나서야 계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이 막 집에 들어서려는데 대문 안쪽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니 한 하인이 문간에 서 있다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갔다. 잘 아는 하인이었는데 왜 그럴까하고 생각하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가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당이 춤을 추고 있었다. 손에는 날이 시퍼런 칼을 들고, 다른 손에는 방울을 쥐고 있었다.

  진오기굿을 하고 있었다. 불쌍하게 호환을 당해 간 딸의 넋을 건지려는 굿이었다. 아롱 아씨는 문득 자신을 생각했다.

  '정말 나는 죽은 걸까. 이처럼 버젓이 살아 있다고 보는 이 몸은 오히려 죽고 난 뒤 나타난다고 하는 귀신은 아닐까. 아니야 나는 죽은 게 아니라 죽게 되었다가 소생한 거야. 나는 살아 있어. 나는 아롱이가 틀림없어.'

  "나는 아롱이가 틀림없다...아."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사람들이 모두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아롱 아씨를 보자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귀신이다. 귀신이 나타났다. 죽은 아롱 아씨의 귀신이 미진한 원을 풀기 위해 나타났다."

  "달아나자."

  "뛰어, 빨리빨리."

  아롱 아씨의 어머니가 두 손을 싹싹 빌면서 아롱 아씨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아가, 에그 불쌍한 것, 네가 그렇게도 갑자기 갈 줄 어찌 알았겠느냐. 그래, 이제 무슨 미진한 원이 있어서 이리 왔느냐. 에그 불쌍한도 하지."

  아롱 아씨가 말했다.

  "저는 귀신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죽은 게 아니에요."

  아롱 아씨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아롱 아씨의 어머니가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네 소원이 무엇이든 다 들어 줄 테니 산 사람들에게 해코지는 하지 말렴. 에그 에그, 불쌍한 우리 아롱아."

  "어머니 저는 사람입니다. 귀신이 아니에요. 어머니의 무남독녀 아롱이입니다.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이 상황을 보다 못한 두운스님이 모녀 사이로 나서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 아가씨는 바로 시주님의 딸 아롱이입니다. 제가 전후사정을 말씀드리지요."

  얘기를 다 듣고 난 유석 내외는 비로소 의심이 풀리고 아롱 아씨를 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난처한 일이 아니냐고 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한 사람은 젊은 여인이고 한 사람은 젊은 남자인데 두 젊은 남녀가 그것도 하룻밤이 아니라 석 달 동안을 한방에서 지냈으니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니냐는 거였다. 유석이 결심한 듯 말했다.

  "우리 아롱이와 혼례를 치른 신랑은 아롱이가 죽은 것으로 알고, 이미 다른 사름을 아내로 맞았소. 그러니 스님께서 내 딸 아롱이를 맡아 주시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부처님이 정해주신 배필인 듯하오. 뒤치다꺼리는 내가 알아서 해 주겠소."

  "배려하심은 감사하오나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아롱 아씨도 저를 좋아하고 저 역시 아롱 아씨가 마음에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오나 저는 불제자로서의 길을 걷겠습니다."

  호장 유석이 말했다.

  "스님의 뜻이 견고함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우리 또한 부처님을 믿는 사람으로 스님을 환속시키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같은 방에서 석 달 동안이나 함께 지냈으니 두 사람은 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 부부나 마찬가지입니다. 거절하지 마십시오. 제 딸이 부족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롱 아씨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훌륭한 현모양처감입니다. 그러나 저와의 관계는 따님이 소상하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아롱 아씨가 그간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오히려 아롱 아씨는 자신이 두운스님을 남편으로 맞으려 했으나 두운스님의 굳은 결심에 감복되어 함께 불도를 닦았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호장 유석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참으로 미안합니다. 스님은 큰스님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무조건 스님에게 우리 아롱이를 맡기려 했습니다. 스님께서 이해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이해라니, 당연한 말씀이지요."

  "그리고 가능하시다면 우리 집에서 며칠 더 묵다 가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마저 거절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렇게 해서 두운스님이 유석의 집에서 며칠을 묵고 떠나려 할 때 유석이 말했다.

  "스님, 우리 아롱이가 소원이 있다고 합니다."

  소원이라는 말에 두운스님은 지레 겁먹은 표정이 되어 물었다.

  "아롱 아씨 소원이라니요?"

  "예, 우리가 스님을 위하여 절을 지어 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스님께서 주석하시던 곳에 새롭게 절을 짓고 다리를 놓아 드리겠습니다. 그것마저 거절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절이 희방사다. 그리고 절 앞의 큰 개울에 무쇠로 다리를 놓았다. 그것이 수철교, 즉 '무쇠다리'다. 희방사가 속해 있는 마을을 수철리라 함도 바로 여기서 기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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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음암(오세암) 관세음보살의 영험설화


  왕성하던 고려 왕조도 점차 황혼을 맞고 있을 무렵이었다. 관료들은 관료들대로 썩어 있었고 지주들이나 선비들도 너무나 부패해 있었다. 나라에 올바른 기강이 없어 정치인들이 썩어있을 때에는 반드시 어느 한 귀퉁이에 변고가 일게 마련이었다.

  지금의 충북 제천 부근에서 얼마 전부터 알 수 없는 괴질이 온 마을을 휩쓸더니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하나하나 앗아가고 있었다.

  이때 설정스님은 30여 년 만에 고향을 찾는 길이었다. 그런데 고향이란 게 어머니의 품속마냥 따스하기는커녕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스님은 이상하다 싶어 어릴 적 살던 집을 찾았다. 논둑이며 밭가에 난 길을 찾아 접어들었다. 가을걷이를 하고 난 밭에는 옥수수 그루터기만 황량하게 남아 있었고 밭 여기저기에 겨울여물용으로 세워 놓은 옥수수짚 다발만이 낟가리로 서 있었다. 옥수수짚을 보며 설정스님은 어릴 적 생각이 나 빙그레 웃었다.

  "어머니, 저도 크면 수염이 나나요?"

  "왜, 벌써 어른이 되고 싶은 게냐?"

  "예, 저도 얼른 커서 옥수수 수염 같은 수염을 턱에 달고 싶어요."

  "원, 녀석두."

  어릴 때 설정스님은 옥수수 수염을 따서 콧수염으로 붙이고 뛰놀던 일이 재미있었다. 어머니는 그때 환하게 웃으시곤 했다. 

  금방이라도 '오근아'하고 아들 이름을 부르며 쫓아나올 것 같은 고향집이었다. 그런데 인기척이 없었다.

  "어머니, 제가 왔습니다. 설정이 왔습니다. 아니, 오근이가 왔습니다."

  설정스님은 대문을 세차게 흔들었다. 대문 한 쪽에는 새 봉자가 큼지막하게 씌어 있었다.

  "이건 새 봉 자라는 거란다. 새 봉."

  "새 봉, 새 봉."

  아버지는 곧잘 외워 대는 어린 아들이 대견하기만 했다. 문위에 여덟 팔 자로 '입춘대길 건양다경'이란 글씨를 비롯해 입춘부를 손수 써 붙이셨던 아버지는 꽤나 유식한 분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새 봉 자를 가리키면서 물으셨다.

  "오근아, 이게 무슨 자라고 했더냐?"

  "예, 새 조 자입니다."

  자신 있게 대답했다가 아버지께 알밤 한 대를 맞은 기억이 새로웠다.

  설정은 문을 열고 들어가 마루에 걸터앉았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마루밑과 봉당뜰 아래에 밀과 보리싹만이 푸르름을 과시하고 있었다. 스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관세음보살님은 어째서 이런 고향엘 가 보라고 하셨을까?'

  설정스님은 3일 전 밤에 설악산 대청봉 아래 위치한 관음암에서 꿈꾼 일을 생각해 냈다.

  "스님, 어서 일어나세요, 고향에 속히 다녀오십시오, 어서요."

  "고향에는 왜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꼭 가야 합니까?"

  설정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름등잔에 불을 붙였다. 꿈이었다. 너무나 선명한 꿈이었다. 오색구름을 타고 나타난 한 여인의 부름에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녀는 분명 관세음보살이었다. 관음암 법당에 모셔진 모습 그대로였다. 아직도 방안에는 향내가 그득했다.

  "그런데 이처럼 황폐한 고향엘 관세음보살은 왜 가보라고 했을까?"

  설정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아랫마을에 산다는 한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이 말했다.

  "허허, 시주를 오신 모양인데, 아무래도 잘못 오셨소이다."

  "아닙니다. 시주를 온 게 아니라, 제가 자란 옛집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이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예, 이 마을은 얼마 전 괴질이 돌아 모조리 떼 죽음을 당하고 말았소, 다만 서너 살박이 어린애가 하나 살았을 뿐이외다. 허, 그것 참. 쯧쯧."

  설정스님은 노인을 따라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거기서 아이를 만났다. 가족관계를 따져 보니 설정스님의 조카였다. 위로 큰형님이 계셨는데 늦게 취처하여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 아이가 바로 그 아들이었다.

  설정스님은 조카 아이를 업고 설악산 관음암으로 돌아왔다. 잘 키워 중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속가로 내보내 가문의 대를 잇게 하려는 마음이었다. 설정스님은 그게 바로 부처님의 뜻이고 자기를 고향으로 보낸 관세음보살의 뜻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아주 야무졌고 또 영리했으며, 순진하였다.

  산짐승이나 새들과 함께 얘기도 나누고 다람쥐나 원숭이들과도 잘 어울렸다. 스님이 산에 나무하러 갈 때는 말벗이 되어 주곤 했다. 아이는 잘 자랐다. 설정스님은 아이의 법명을 지어주었다. 선두라 했다. '두'자는 어조사이고 그냥 '착한 아이'란 뜻이었다. 속가의 이름이 '선돌이'였는데, 그 이름을 따서 그대로 지은 것이었다.

  선두는 어느새 다섯 살이 되었다. 스님을 따라 조석 예불에 참예하여 '반야심경'을 곧잘 외워 대곤 했다. 잔심부름도 너끈히 해 냈다.

  스님이 밥을 짓노라면 부엌에 따라나와 부지깽이로 장작더미를 두들기며 목탁치는 흉내를 내면서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곤 했다. 스님이 대견해서 물었다.

  "애, 선두야."

  "예, 스님."

  "관세음보살은 어떤 분이라 했지?"

  "관세음보살은 어머니 같은 분이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그래, 잘했다. 어이구 우리 선두 영리하기도 하지."

  선두는 맑은 눈망울을 굴리면서 삼촌인 설정스님에게 와락 안겼다. 스님은 선두에게서 전해져 오는 아련한 핏줄의 정을 느꼈다. 볼이 참으로 따스했다.

  '무럭무럭 자라서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텐데.'

  설정스님은 선두를 내려놓고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선두가 스님의 눈물을 보고 침울해져 물었다.

  "스님, 울고 계세요?"

  "아니다. 울긴 내가 왜?"

  설정스님은 짐짓 환한 웃음을 지여 보였다. 그러나 마음속은 쓰리고 아팠다.

  '불쌍한 녀석, 아버지 어머니 얼굴도 모르고...너무 외로운 녀석이야.'

  그 해 초겨울이었다. 겨우살이 준비를 하던 설정스님은 양식이 떨어진 것을 보고 시주를 해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설악산 대청봉 아래서 겨울 양식이 떨어지면 찾아오는 신도도 없고 큰일이었다. 설정스님은 시주를 하러 가기 위해 신들메를 했다. 선두를 돌아봤다. 데리고 갈 수도 없었고 그냥 놔두고 가자니 그렇고, 적어도 닷새는 혼자 있어야 하는데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님은 선두를 앉혀 놓고 말했다.

  "내가 양식을 구해 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닷새는 걸릴 듯싶구나. 그 동안 너 혼자 있을 수 있겠느냐?"

  선두의 맑은 눈망울을 바라보던 스님은 차라리 말없이 그냥 다녀올 걸 그랬다는 후회도 했다. 그런데 선두는 오히려 의젓했다.

  "네, 스님. 혼자가 아니고 관세음보살님하고 둘입니다."

  설정스님은 깜짝 놀랐다. 선두의 대답에서 어떤 어른보다도 엄청난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랬구나. 관세음보살님이 계시는구나. 그럼, 관세음보살님하고 절 좀 지키고 있거라. 내 속히 다녀오마."

  사립문을 나서던 설정스님은 선두를 돌아보며 다시 한번 다짐을 했다.

  "어떤 경우라도 멀리 나가지는 말아라. 그리고 무서움이 일거든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불러야 한다."

  선두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장 법당에 들어가 목탁을 치켜들며 스님에게 내보였다. 설정스님이 산문 밖을 나서서 멀리 떨어졌을 때도 선두의 목탁 두드리는 소리는 아련히 들려오고 있었다. 설정스님은 걸음을 재촉하여 해질녘에 양양에 도착하였다. 양식은 넉넉히 구했다.

  산으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어닥쳤다. 어린 선두 생각 때문에 급히 떠나려는 스님은 마을 사람들은 한사코 말렸다. 이 눈보라치는 밤에 어떻게 가겠느냐는 것이었다. 설정스님은 그렇게 해서 하룻밤을 양양에서 묵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밤새 눈이 내려 지붕처마 밑까지 쌓여 있었다. 양양도 그러한데 설악산은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눈이 왔다 하면 설악산은 열 자 스무 자씩 쌓이는 게 보통이었다.

  하는 수 없이 설정스님은 그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 그 해 겨울 따라 유난히 추위가 심해서 좀체로 눈이 녹지 않았다. 겨울눈이 원망스러웠다.

  이듬해 봄이 왔다. 그 동안 몇 번이고 길을 떠났다가는 실신해 쓰러져 있는 설정스님을 사람들이 발견해 대처로 데려오곤 했었다. 여러 번의 사고로 인해 몸은 쇠약할 대로 쇠약해졌다. 그러나 이젠 봄이었다. 그는 동네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설악산을 향했다.

  대청봉에 오르니 저 아래 골짜기에 관음암이 오롯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설정스님은 바람소리에 실려 오는 목탁소리를 들었다. 선두의 목탁소리라는 직감으로 알아챘다. 그러나 그는 믿지 않았다. 양식도 떨어진 데다 어린것이 몇 달 동안 살아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설정스님은 미친 듯이 선두를 부르면서 달려 내려갔다. 단숨에 임자에 이른 스님은 법당 밖에서 숨을 돌렸다. 법당 안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는 어린 선두의 소리가 목탁소리에 겹쳐 들려 왔다.

  그때였다. 웬 젊은 여인이 오색 치맛자락을 끌며 법당을 나오더니 아름다운 채색구름을 타고 멀리 날아가 버렸다. 스님은 두근거린는 가슴을 부여안고 법당문을 조용히 열었다.

  "선두야."

  "스님."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싸안았다.

  "스님."

  "아이구, 네가 살아 있었구나."

  "아니, 그럼 제가 살아 있지요. 스님이 오시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그래, 별다른 일은 없었느냐?"

  "예, 스님 말씀대로 관세음보살을 불렀더니 관세음보살이 오셔서 같이 놀아 주고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했어요.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하고 너무나 똑같은 분이었어요."

  설정스님은 너무나도 감격하여 선두를 끌어안고 한없이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그 날로 다섯 살 난 선두의 인연을 바탕으로 절 이름을 '오세암'이라 고쳤다.

  그 후 오세암은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쳤으나 6.25때 전소하고 지금은 방 한 칸이 이 전설과 함께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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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내장사 장군샘과 천하장사 희묵스님 이야기




  내장사는 본디 영은사라 불렸다.

백제 제30대 무왕 37년(636)에 영은조사가 창건하여 그의 이름을 땄기 때문이라 한다.

  내장사라 불리게 된 것은 1938년 매곡선사가 현재의 위치로 옳겨 새롭게 중창하며서 붙인 이름이다. 이 내장사를 중심으로 한 내장산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다름아닌 장군샘에 관한 것이다.


  조선 제13대 명종(1545--67재위) 때의 일이다.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내장산 영은사에 희묵스님이라는 고승이 주석하고 있었다. 그는 힘이 세기로 천하장사라는 별명이 따라다니곤 했다.

  하루는 땔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다. 험한 산세도 산세려니와 울창한 숲은 한낮에도 햇빛을 보기가 어려웠고 또한 산짐승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낫을 들고 나뭇가지를 쳐 서너 단 했을 때였다. 뭔가 기분이 섬뜩하다고 느낀 희묵스님은 비탈 위를 바라보았다. 시커먼 천연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호기심이 일자 그는 동굴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옳겼다. 내부는 어두웠다. 바로 그때 두개의 불이 동굴 안에서 번쩍 빛났다.

  '아마 눈 큰 놈(호랑이)이 있는 모양이로군. 틀림없어.'

  그렇게 생각한 희묵스님은 오른손에 들고 있는 낫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여차하면 내리찍을 기세로 살금살금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어홍."

  집채만한 호랑이가 희묵스님을 향하여 고함소리와 함께 달려들였다. 순간 희묵스님은 새끼 호랑이들을 분명히 보았다. 제새끼를 위해 외부 침입자를 경계하던 어미 호랑이가 모성애의 본능을 발휘하여 달려든 것이다.

  그때 벼락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노옴!"

  희묵스님의 고함이 얼마나 컸던지 동굴 안이 쩌렁쩌렁 올이며 천정과 벽쪽에서 바윗조각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달려들던 호랑이가 주춤하고 서 버렸다. 그놈도 분명히 놀란 것이다. 희묵스님 또한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달려드는 호랑이를 피할 생각도 않고 우뚝 서 있었다.

  그 다음 순간적으로 희묵스님은 호랑이를 향해 달려들였다. 한 손으로는 호랑이 목을 죄며 다른 한 손으로는 들고 있고 낫등으로 일격을 가했다.

  그는 호랑이를 죽일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러기에 낫등으로 내려친 것이다.

  호랑이는 다시 한번 비명을 치더니 그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참으로 놀라운 괴력이었다.

  마침 그때, 희묵스님이 호랑이와 싸우던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다.

영은사 아래 사하촌 사람으로 평소 희묵스님을 존경해 오던 터였는데, 바로 그러한 장면을 직접 보고 나서는 참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굳혔다.

  희묵스님은 쓰러져 있는 호랑이를 주물러 회생시킨 뒤 호령하였다.

  "어서 네 새끼들을 돌볼아라.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사람한테는 덤벼들지 말아라. 알겠느냐?"

  호랑이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새끼들이 기다리고 있는 동굴 저편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소문이 퍼져 나가자 동네 사람들은 물론 전국 각지어서 승속을 초월하여 희묵스님을 만나 보고자 모여들어 내장산 일대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또 한 번은 스님이 아랫마을로 시주를 하러 내렸갔다. 마침 동네에서는 큰 황소 두 마리가 서로 뿔을 맞대고 싸우고 있었고 사람들는 그 소를 뜯어말리려 애쓰고 있었다.

  이를 본 희묵스님이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앞으로 썩 나서며 말했다.

  "멀리 비켜나십시오. 가까이 갔다가 행여 크게 다칠지도 모릅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희묵스님은 황소 곁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는 황소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네, 이놈! 아무리 축생이기로서니 싸움질이나 해서야 쓰겠느냐? 이노옴!"

  싸우던 홯소가 스님이 고함소리에 놀라 잠깐 떨어지는가 싶더니 희묵스님을 향해 한꺼번에 돌진해 왔다. 그러나 희묵스님은 비키지 않았다. 순간, 스님의 두 팔이 동시에 나가든가 싶었는데 어느새 두 손에 각각 황소의 뿔 하나씩을 거머쥐고 재주를 한 번 넘었다. 황소들은 목이 꺾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광경을 바라본 사람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우와."

  "와."

  "야, 대단한 괴력이다."

  희묵스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툭툭 털면서 밖으로 빠져 나왔다.

황소 두 마리는 한참 만에야 버르적거리더니 일어났고 각각 주인의 끌려갔다.

  그의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 한 번은 호랑이와 대적을 했고 또한 번은 한꺼번에 황소 두 마리를 대적했으니 소문이 퍼져 나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 당시 힘이 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스님이 또 한사람 있었다. 희묵스님의 일화를 소문으로 들어서 알게 된 그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한 번 겨루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희묵스님이 50대인데 비해 자신은 20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더욱 자신만만했다. 그의 이름은 희천이었다.

  희천스님이 내장산 영은사로 희묵스님을 찾아왔다.

  "젊은 객승 문안이옵니다. 희묵스님을 친견코자 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보기에도 힘을 좀 쓰게 생겼다. 키는 7자에 가까웠고 몸무게도 어림잡이 2백 근 이상 나갈 듯싶었다. 두 눈은 형형했으며 한 번 사람을 쏘아보면 그 눈빛에 상대방이 얼어 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희묵이오. 어인 일로 나를 찾아오셨소이까?"

  희천이 바라보니 희묵스님은 키도 그리 크지 않았고 몸집도 작았다. 하지만 그가 천하장사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는 이상 쉽사리 보아 넘길 수도 없었다.

  "소승, 큰스님 문하에서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큰스님께서는 천하장사라 하시던데 그 또한 전수받고 싶습니다."

  "천하장사라? 허허. 남들이 그렇게 말들은 하고 있지만 나는 수행하는 중일뿐이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오."

  희묵스님은 매우 겸손했다. 그러나 희천스님은 젊은 패기로 희묵스님을 이겨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희천은 도저히 희묵스님을 당할 재간이 없음을 알고 진실로 마음을 굽혀 그의 제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희천스님은 희묵스님이 어떻게 힘을 기르는지 알고 싶었고, 또 배우기로 했다. 하지만 희묵스님은 특별히 운동을 한다거나 체력 단련을 하지도 않았다.

  희천은 희묵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희묵스님은 새벽 예불을 끝내고 나서 어김없이 등산을 했다. 특별히 장비를 갖추고 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차림새로 등산을 했다. 희천은 희묵스님의 뒤를 밟았다.

  영은사 뒷산을 오르는 스님은 나는 듯이 빨랐다. 이윽고 한참을 오른 희묵스님은 산 중턱에서 물을 한 움큼 마시고는 곧바로 산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 다음 다음날도 희묵스님의 행동은 마치 정해진 길을 오가는 시계추마냥 일정했다.

  '그렇다면 저 샘물에 혹시 힘을 길러 주는 어떤 특유의 성분이 있는 것은 아닐까?'

  희천스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희묵스님의 뒤를 이어 그 샘물을 움켜 마셨다.

그렇게 한 파수가 흘러갔고 다시 한 파수가 끝나 갈 무렵, 희천은 생각지도 않았던 어떠한 힘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물맛이 좋았다. 희천도 전국의 약수터에서 좋다는 물은 다 맞보았지만 내장산 영은사 뒷편의 샘물만큼 맛좋은 약수는 아직까지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 희묵스님은 아무래도 희천의 거동이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희묵스님의 뒤를 밟던 희천은 이미 알아낼 것을 알아낸 뒤라 방심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오히려 희묵스님의 미행을 당했다. 희묵스님은 희천이 자기만 알고 있는 샘물을 마시고 있음을 알아냈다. 희천이 막 물을 마시고 있을 때 난데없이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스승 희묵스님의 음성이었다.

  "네, 이놈, 어찌하여 스승의 허락도 없이 맘대로 샘물을 마시고 있느냐?"

  물을 마시는 것이 무슨 죄일까마는 갑작스레 당한 일에다가 스승만이 알고 있는 샘물을 폭로시켰다는 생각에 희천은 송구스런 마음을 어쩔 줄 몰라 했다.

  희묵스님은 제자를 시험하기 위해 산봉우리로 올라가 크고작은 돌들을 산 아래로 던졌다. 희천스님 역시 원래 힘이 센데다가 젊은 혈기로 스승이 굴리는 돌들을 모두 받아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지금도 내장사에 가면 그때 희천스님의 받아 쌓았다는 돌무더기가 남아 있다. 하여튼 두 스님은 모두 힘이 세기로 유명했으며 그 힘은 바로 내장사(당시의 영은사) 뒷산에 있는 샘물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그 샘물을 장군샘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희묵스님와 희천스님은 승병을 진두지휘하여 왜병에 맞서 싸웠으며 승병들은 두 스님을 장군으로 호칭하였다. 그래서 그 산봉우리를 장군봉이라 부르며 그 샘을 장군샘이라고도 했다.

  산장에서 희묵스님의 지휘처소였다는 장군바위, 또는 용바위가 있고 산의 북쪽 기슭 밑의 신선대 부근에는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내장사 주차장이 있는 사하촌 입구에서 왼쪽으로 백양사 가는 같이 있다. 이 고개는 승병들이 주둔던 곳으로 유군치라 불린다. 희묵스님과 희천스님이 바로 이 유군치에서 왜병들을 쳐부수었다.

  두 스님은 그들의 왕성한 힘을 이처럼 국수를 수호하는 일에 썼다. 내장사 일대에는 이들의 얘기가 신화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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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갑사 창건과 며느리서까래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월출산에 자리한 도갑사는 신라말기의 위대한 고승 선각국사 도선(827--898)이 창건한 절이다.

  원래 이곳에는 문수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도선이 어린시절을 보내던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의 어머니 최씨가 빨래를 하다가 물 위에 떠내려 오는 참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여 낳았으나 불길하다 하여 숲속에 버렸다 한다.

  그런데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그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 길렀다. 나중에 이를 안 최씨가 문수사 주지에게 부탁하여 기르도록 했으며, 장성한 그가 중국을 다녀와서는 문수사를 다시 신축하여 도갑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 도갑사 창건에는 당대의 제일의 국수인 목림 사보라와 그의 며느리 김씨에 대한 일화가 깃들어 있으며, 그로부터 부연, 즉 들연 끝에 덧얻는 짧고 네모진 서까래, 다시 말해서 며느리서까래란 말이 생기게 되었다.

  요즈음 우리가 쓰고 있는 말 중에서 부연설명이라 할 때의 부연은 본디 부연과 음이 같은 데에서 유래했으며 나중에는 따로 독립하여 쓰게 되었다. 부연이란 한마다로 덧붙인다는 뜻이다.

  신라 말기,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해 가을이었다. 월출산 산마루를 붉은 노을이 아름답게 수놓을 무렵 드넓은 절터 한복판에 흰 수염을 날리며 못 박히듯 망연히 서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목림 사보라였다.

  그는 서까래를 번쩍 들어 세워서는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다가 다시 바닥에 눕혀 놓았다. 그리고는 자로 쟀다. 자로 재고 나서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동작까지도 서까래마다 몇 차례씩 반복했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맞는 것 같았는데 도대체 뭣 때문에 서까래마다 이렇게 짧아졌지?"

  석양은 마지막 남은 불길을 어둠 속에 묻어 버렸다. 노인에게 짧은 가을 해가 못내 아쉬웠다. 땅거미가 진 지 오래였지만, 그는 여전히 서까래를 만져 보고 재 보고, 밝은 데 나와서 자의 눈금을 확인해 보곤 했다.

  팔순이 넘은 사보라 노인은 이 불사를 필행의 마지막 작업으로 삼아 온 정성을 다해 나무를 깎고 다듬었다. 젊은 목수들의 도움도 마다하고 5백 개의 서까래를 혼자 준비했다. 그는 밤잠을 설쳐 가면서까지 며칠 동안 일했다.

  상량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사보라는 더욱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서까래를 새로 구입할 재원도 문제였지만, 설사 새로 들여왔다 해도 다듬고 어쩌고 할 시간이 없었다. 더욱더 큰 문제는 이미 용기를 잃은 노인 자신이었다.

  "분명히 설계도면대로 깎았는데,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네."

  사보라는 중얼거리며 재고 또 재보았지만 한번 짧게 잘린 서까래가 다시 길어질 리 없었다.

  "낭패로군, 새로 나무를 구입할 수도 없고 제날짜에 법당을 지을 수 없으니 왕명을 어긴 죄를 어이할까."

  도갑사는 왕명에 의해 시작된 불사였다. 왕은 안으로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부처님의 가피력에 기대 보겠다는 마지막 희망을 안은 채 지금의 전남 영암 월출산 기슭에 아흔아홉칸의 대가람을 세우도록 영을 내렸다.

  당시 신라 국법에는 왕궁 이외에는 백 칸을 넘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었지만 왕은 더 크게 짓고 싶었다. 그러나 왕도 국법을 어겨서는 안 되었다. 대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쉬움을 머금고 신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게 아흔 아홉 칸의 대웅보전을 짓도록 했던 것이다.

  대웅전 같은 사찰양식의 건물을 아름답고 웅장하게 지으려면 특히 선의 우아함을 잘 살려야만 한다. 용마루의 날씬한 곡선이며, 하늘을 차고 나를 듯한 지붕의 처마는 여인들의 버선코를 본따야 한다.

  그러려면 뭐니뭐니 해도 서까래를 잘 다듬어야 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해서 신라 제일의 목수인 사보라 노인이 불사를 맡게 된 것이다.

  노인은 생전 처음 맛보는 절망감으로 온몸의 기운이 쭉 빠져 버렸다.

  "팔십 평생을 나무와 함께 늙어 온 내가 이제 와서 이런 실수를 하게 되다니. 그것도 왕명으로 짓는 대가람에다, 내 필생의 마지막을 건 공사에서 말이다.

  그는 서 있는 나무의 겉모습만 보고도 나무의 나이를 알았고 결이 어떠하며 무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았다. 나무가 단단한가 무른가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라에서 제일가는 대목으로 불렸다. 국수의 명예가 공허한 수렁에 빠져 들어감을 느꼈다.

  그는 집 짓는 일에서 보람을 찾았다. 보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 나무를 다루는 일이야말로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우릴는 천직으로 알았다. 그것은 그대로 삶의 예술이었고 목수일을 떠나서는 자신의 인생관을 말할 수 없었다. 맨 처음 스승의 허락을 받고 끌을 쥐었을 때 얼마나 신났던가.

  노인은 절망의 밑바닥에서 인간힘을 썼다. 생명의 불꽃이 순간에 사그라짐을 느꼈다. 온 생애가 마치 땅속으로 잦아드는 것만 같았다. 몸은 물먹은 솜이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노인의 눈에는 절망만이 감돌았다. 그는 그만 자리에 누워 침식을 잊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맞지 않았다.

  노인은 자리에 누워 평생 동안 지은 집들을 떠올려 보았다. 왕궁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찰, 그리고 명문 귀족들의 집이며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어느 하나 실수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지."

  사보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않았다. 며느리 김씨가 갖다놓은 약그릇에 손을 대었다. 약그릇에 담긴 자신의 초췌하고 파리한 그림자를 보는 순가, 그는 자신이 없었다. 다시 자리에 눕고 말았다.

  밥상을 들고 들어온 며느리가 조심스럽게 누워 있는 시아버지 사보라 곁에 않았다. 며느리가 말했다.

  "약도 드시지 않고, 아버님 저녁 진지 드시지요."

  "생각이 없구나. 상을 물리렴."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지요? 며칠째 누워만 계시고 약도 진지도 드시지 않으니 걱정이 되옵니다."

  "아무 일도 아니다. 내가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또 네가 알 바도 아니구나."

  "하오나 아버님, 제가 시집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만약 우환이 있으면, 모두 제 탓이다 싶어 송구스러워서요."

  "아가, 네 탓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다, 모두 내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니,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며느리 김씨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아버님, 옛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행여 저의 미욱한 생각이나마 도움이 될지 모르잖습니까. 부디 말씀해 주세요."

  "네 간청이 하도 지극하니 내 말하마. 허나 큰 도움은 되지 않을 듯싶구나."

  사보라는 노인은 사실대로 얘기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며느리 김씨는 눈앞이 아득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며느리 김씨는 눈앞이 아득했다. 누가 뭐래도 시아버지인 사보라만큼 뛰어난 목수는 없었다. 그 시아버지조차 해결할 수 없는 목수 일을 전혀 문외한인 며느리가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며느리 김씨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고 조용히 시아버지 곁을 물러났다. 마당에 나와 심호흡을 했지만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시어머니도 신랑도 모두 침울한 근심 속에서 지냈다.

  상량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지만 사보라 노인은 아직도 자리에 누워 있었다. 공사를 감독하는 관료들은 사보라가 왜 병이 났는 줄도 모르고 병문안을 왔다.

  "사보라 영감님, 이제 사흘 뒷면 상량을 합니다. 상량을 하고 서까래만 얹으면 목수 일은 거의 끝난 셈이나 다름이 없으니 부처님의 가호로 속히 쾌차하시길 빕니다."

  노인은 눈으로 인사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관료들, 문병객을 전송하고 돌아서는 며느리 김씨의 눈에 이상한 것이 비쳤다.

  한 줄로 가지런한 서까래가 두 줄로 보였다.

  김씨는 처마 밑으로 바싹 다가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까래는 분명 한 줄이었다. 김씨는 깨달았다. 집 안의 불빛과 집 밖의 불빛이 마주치면서 일어나는 그림자의 착시현상이었다. 더욱이 며느리 김씨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던 것이다.

  "아, 그래 바로 저기야."

  며느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시아버지 처소에 뛰어들어갔다. 며느리 김씨가 말했다.

  "아버님, 서까래가 짧게 다듬어졌다고 하셨지요?"

  "그래, 아가. 그렇지만 네가 웬일로 그리 밝게 웃느냐?"

  "아버님, 짧게 다듬어진 서까래에 다른 서까래를 겹쳐 대면 더 장엄하고 튼튼하지 않겠습니까?"

  노인은 비록 여든 고개에 올라선 이였지만, 목수로 일생을 살아왔다. 처음에는 며느리의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마침내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구나, 그래."

  "그렇지요, 아버님?"

  "그렇다마다, 정말 네가 나를 일깨워 주었구나. 원 이렇게 고마울 데가."

  노인의 눈앞에 날아갈 듯한 대웅전의 자엄한 모습이 나타났다. 노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렇구나, 아가. 부연하면 된다. 서까래를 달아 이어 놓으면 육중하면서도 날렵한 모습이 되겠구나. 부연한 그 지붕의 멋을 누가 감히 흉내낼 수 있겠느냐. 어서 채비를 해 다오."

  며느리 김씨는 적이 걱정되었다.

  "아버님, 아직 건강이 회복되시지 않았는데. 더욱이 지금은 야심한 밤이옵니다."

  "아니다. 우선 가서 부연목을 재 봐야겠구나."

  노인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활기가 넘쳤다. 온몸에 달빛을 받으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보라 노인의 모습은 한마디로 아름다움이였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재고, 대들보에서 처마 끝을 재는 사보라 노인의 흰 수염이 더욱 멋지게 보였다.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부연목을 켜기 시작했다. 노인의 표정은 엄숙하면서도 진지했다. 한마디로 예술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세원진 도갑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연식 지붕 건물이 됐다. 며느리 김씨의 지혜로 생긴 서까래라 해서 '부연'이라고 했다.

  지금은 이 도갑사 대웅전이 '79년도 중창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도갑사 해탈문은 국보 제50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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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 : 기름작물


현재 30여종이 있으며 원산지는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아프리카 사반나지대로 보고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 문헌에 벡제에서 참깨가 도입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때 부터는 분명하게 재배가 되었습니다.


검은깨는 토마,거승자라고 불리웠으며

흰깨는 백지마라고 불리웠습니다. 


참깨파종

씨뿌리기는 3월 초순부터 4월 초순까지

옮겨십기는 5월 초순, 중순까지

직파시 2개 남겨두고 속아내야한다.


참깨 농약

역병, 잎마름평, 진딧물, 노린재, 깍지벌레, 왕담배나방, 점박이응애, 담배가루이



참깨 순자르기

즉 꽃이 피는 부분의 줄기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영양분이 꼬투리 즉 참깨방으로 가 참깨가 토실 토실해지고 바람이 불거나 비가 많이 왔을 때 쓰러짐을 예방해주는 역할도 합니다.


참깨 수확은 

아래 꼬투리(참깨방)이 2~3개 벌어질 때

즉 8월 중ㅅ순~9월 상순


참깨효능

1. 노화방지, 항암작용 (비타민E, 세사민, 세사모린)

2. 혈관질환예방 (불포화 지방산 올레산, 리놀레산)

3. 뼈건강, 골다공증예방 (칼슘, 비타민B1,B2, 인, 철분)

4. 뇌 건강, 치매예방(레시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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